해외진료 갤러리

믿음의 나무 에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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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피지 (16회) 일시: 2008년 7월 8일~16일 장소: 피지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김성태 교수, 임문우, 구본찬, 이근형, 조기수, 한원섭, 이기주, 우상엽, 구본진, 이규화, 최성숙, 문현승, 곽진희, 유성훈, 최희곤, 민성창, 박성우, 김태현, 정서연, 최영준, 고재민, 김지민, 서형은, 서민정, 정민선, 정하나, 임지인, 임아린, 한아림, 구예모, 조아라   한원섭 (19회 졸업생, 런던치과 원장)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지난 8월의 어느 날, 단기선교를 여러 번 함께했던 후배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았다. “형님, 해외진료 24주년에 만들 책 원고 마감을 해야 하는데 피지에 다녀온 이야기를 좀 맡아 주세요.” 그래서 글을 잘 쓸 능력은 안 되지만 10년 전 피지에서의 사역을 생각해 보았다. 기억을 떠올리려고 피지에서 찍은 사진도 꺼내 보며 그해 여름의 나를 돌이켜 보니, 새삼 나에게 단기 치과 의료선교가 어떤 의미였는지 되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며칠 전 50번째 생일이 지났다. 86년에 치과대학에 입학한 지도 벌써 30년, 내년이면 졸업 25주년 행사를 한다고 하니 치과의사가 된 지도 벌써 25년이나 지난 것이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배들의 손에 끌려 다락방을 처음 방문한 후, 여름과 겨울에 진료봉사를 다니고, 치과의사가 된 후로도 1년에 한두 번 해외 진료봉사를 다니며 셀 수 없이 많은 진료봉사를 다녔지만, 피지에서 에셀 팀과 함께 한 진료는 나에게 있어 더욱 특별한 시간이었다. 그 이전까지의 진료봉사는 땅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생각과, 부르시면 간다는 마음으로 배낭에 마취제와 주사기, 엘리베이터와 포셉 등 기구 몇 개를 담아 전기도 없는 오지에 의료팀과 함께 고행을 간 것이라면, 피지에서의 에셀 진료는 다른 치과의사들과 함께 한 부담이 적은 진료였다. 다녀온 후 사진을 본 아내가 “당신 봉사 갔다 온 거야, 아님 휴양 갔다 온 거야?” 할 정도로 많은 동료와 함께 훌륭한 진료 환경, 휴양지 같이 좋은 숙소와 식사 등 다른 어떤 때보다 편하게 봉사한 것은 사실이었다. 중학생이 된 큰 딸아이와 함께 한 첫 의료봉사였기 때문에 신경을 쓴 탓도 있지만, 에셀 팀을 선택한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즈음 들려온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의 치과 진료에 의한 광범위한 에이즈 전파로 치과 의료선교 활동이 전면 중단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한국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병원에서의 교차 감염 등이 떠올라 단기 의료선교에 대한 한계성을 돌아보게 했다. 나도 그런 진료를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무거운 마음으로 방황할 때, 에셀 진료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었다. 10여 명의 치과의사를 포함해 30명이 넘는 전체 팀은 전문적인 진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도 디지털 엑스레이를 사용해 근관 치료를 한 것은 물론, 미니 오토클레이브를 사용함으로써 교차 감염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게 된 최초의 해외진료였다. 또한 의사들이 과목을 정해 종합병원 수준의 진료를 체계적으로 시행함으로써 통증만 가라앉히는 응급처치 개념이 아닌 제대로 된 진료를 할 수 있었다. 피지에서 까맣게 변색되고 망가진 앞니를 신경치료와 함께 레진으로 수복해주면 거울을 보며 신기해하던 환자들. 그 모습을 보면서 마술사 보듯 딸아이가 좋아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러한 종합 진료가 가능하려면 급한 경우 제너레이터 등을 이용해서라도 전기의 공급을 반드시 해야 하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지역의 선택 또한 필수적이다. 물론 단기 치과 의료선교는 영혼을 직접 구하는 적극적 선교활동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활동을 통해 조그마한 믿음의 씨앗이라도 뿌려야 하는 열악한 지역이 아직도 세상에는 많다. 일주일의 의료선교로 즉시 열매를 맺기는 어렵겠지만, 나의 헌신을 통해 믿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현지에 계신 선교사님들이 그 씨앗을 싹틔워 성장시키고, 믿음의 열매를 맺도록 돕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올해는 교회에서 맡은 일이 많다는 핑계로 30년 만에 해외진료 없는 첫 여름을 지냈다. 왠지 모를 허전함을 가지고 이 글을 쓰면서 에셀 해외진료 24년, 아니 학생 때의 국내 노방전도를 포함해 40년 이상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지도하며 인도해주신 백형선 교수님께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울러 임문우 선생님, 김성오 교수를 포함한 모든 에셀 해외 진료팀 선배, 동료, 후배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들에 감사한다. “정말 사랑합니다.”  
2007년 중국 하얼빈 (15회) 일시: 2007년 7월 14일~21일 장소: 중국 하얼빈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김성오 교수, 임문우, 구본찬, 이근형, 조기수, 한원섭, 이기주, 우상엽, 구본진, 최성숙, 김진욱, 도레미, 박용태, 박지현, 이승준, 한윤식, 유성훈, 백윤재, 표세욱, 최희곤, 김태현, 박성우, 손기요, 김지혜, 권혜영, 김지혜, 박유나, 임아린, 구권모, 이경연, 조아라, 한아림   유성훈 (36회 졸업, 스마일어게인치과 부원장) 이제 꿈처럼 느껴지는 중국 하얼빈 선교는 내게 큰 의미였다. 에셀 회장이라는 큰 책임감으로 임했던 선교였기 때문이다. 에셀 사역은 늘 은혜로 충만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지만 하얼빈 선교만큼은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역은 그해 7월 14일부터 21일까지 진행되었다. 늘 에너지가 넘쳤던 최광식 선교사님이 직접 하얼빈 상황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학교에 오셨다. NGO 단체인 DAWN의 최 선교사님은 단체에 대한 설명과 현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1,500명의 환자에 대해 들려주셨다. 예년보다 확연히 많은 환자 수에 놀랐고, 마음속에서는 설렘과 중압감, 사명감 등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결국 더 많은 기도로 준비하는 방법밖엔 없었다. 본과 3학년 1학기 기말시험이 끝나자마자 첫 기도회 일정을 잡고, 해외진료 가이드북을 만들었다.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내가 무엇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에 즐겁기만 했다. 학생들의 역할은 실행보다는 준비하는 기간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우선 현재 보유한 진료 물품들을 파악해야 했고, 가방에 나누어 담는 작업이 이어졌다. 함께 가는 OB 선배들도 모일 때마다 우리의 짐을 체크해주셨다. 에셀이 어떻게 이렇게 큰 규모의 해외 치과 의료선교를 매년 해낼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준비는 생각만큼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가방의 무게를 맞추는 일도, 가방에 들어갈 물건을 나누는 일도 쉽지 않았다. 몇 개 분실해도 진료가 가능하도록 가방을 구성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선교사님이 세관 통과의 어려움을 염려했기 때문에 더 많은 기도로 준비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출발일이 되었다. 전날까지 ‘뭐 빠진 건 없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다. 선교를 떠나는 마음의 부담보다 진료 준비가 끝났다는 해방감에 기뻤고, 발걸음도 조금 가벼워졌다. 하지만 중국에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내려두었던 걱정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가장 걱정을 많이 했던 세관 통과를 앞두고 다시 한 번 기도를 했다. 매번 그렇듯이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바로 응답을 해주셨다. 걱정과 달리 세관 통과가 정말 형식적으로 간단히 진행되었다. 하나님이 이 사역을 주관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하얼빈에 위치한 ㅁㅂ학교에서 진료를 했고, 숙소는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하얼빈 사범대학 내 호텔이었다. 방마다 에어컨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진료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기계에 종종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진료에 차질이 없을 정도로 사소한 문제들이었다. 보존 체어 6개, 치주 체어 2개, 외과 체어 1개로 구성된 진료실은 예년보다 큰 규모답게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매일 새벽에 가졌던 경건회는 마음을 모아 하루 동안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기도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중국 선교는 진료지가 두 곳이라 장소를 옮겨야 하는 숙제가 있었다. 그 많은 장비를 정리하고 다시 설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이 많다 보니 잃어버린 장비가 생겨나기도 했다. 즐겁지만 힘겨운 선교 기간을 보내던 중 한번은 음식 알레르기로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거의 헬멧을 쓴 것처럼 보일 정도.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심해져 인근 병원에서 링거를 맞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개인적으로 좀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날이 되었다. 마지막 이틀은 환자가 물밀듯이 밀려와 바쁘게 진료를 마쳤다. 최 선교사님의 예상과는 달리 총 환자 854명이라는 작년 대비 조금 적은 환자를 보았지만 총 진료는 1,124건으로 작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우리는 말로만 듣던 731부대를 탐방했다. 1932년에 설립해 1945년까지 생화학무기의 개발을 위해 치명적인 인체 실험을 했던 악명 높은 곳. 주로 중국인과 한국인을 대상으로 사람을 죽이는 다양한 방법을 산 채로 실험했던 흔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를 참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도 찾아가 독립투사의 민족정신을 느끼고 그분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진료하는 동안 내내 날씨가 무척 좋았다. 우리가 서늘한 곳에 있으면 따뜻한 햇살이 우리를 반겼고, 어두운 곳에 있을 땐 맑은 햇살과 선선한 바람이 다가왔다. 이런 은혜를 받았던 우리의 진료가 잘 마무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은혜롭게 진료를 마쳤다는 기쁨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하루 일과가 끝날때마다 차안에서 늘 감사의 기도로 함께 했다. 책임감을 가지고 떠났던 선교였던 만큼 많이 힘들었고 걱정도 많았지만, 그만큼의 영적인 성숙을 통해서 주님께 더 다가갈 수 있는 참 좋은 경험이었다.    
2006년 인도네시아 웅아란 (14회) 일시: 2006년 7월 9일~16일 장소: 인도네시아 웅아란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최성호 교수, 김성오 교수, 임문우, 구본찬, 이근형, 조기수, 우상엽, 최재평, 이윤섭, 김지희, 문현승, 김진호, 박정임, 박지현, 곽진희, 민성창, 백윤재, 유성훈, 김태현, 박성우, 정현우, 김지혜, 양명재, 임지인, 구권모, 조아라, 이경연   최재평 (31회 졸업, 제트구강악안면외과치과 원장) 보로부두르 사원의 장엄함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우리 집 거실에는 10년 전 인도네시아 선교사님이 선물로 주신 목각 장식품이 걸려 있다. ‘JESUS’와 ‘인도네시아 선교’라고 적힌 글자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인도네시아에서의 기억은 멀고도 가까운 것 같다. 10년 전 일기를 꺼내듯 10년이 지난 사진들을 다시 보니, 대원들의 기도와 여러 선배님들의 헌금 덕분에 그해 7월 9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된 선교 사역에 참여할 수 있었던 시간이 떠올라 감사가 밀려왔다. 당시 인도네시아 봉사 대원들은 30명 정도로 구성되었는데, 초등학생, 중학생이었던 대원 자녀들이 지금은 대학을 졸업해 사회로 진출할 나이가 되었으니 세월의 힘은 크고 위대하다. 7월 9일 인천에서 국제선으로 발리에 도착해 다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자카르타에서 다시 버스로 2시간 남짓 가는 제법 긴 여정이었다. 현지 국내선 항공편 수화물 적재 용량의 한계로 진료품목 일부가 늦게 도착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현지 양춘석 선교사님의 세심한 배려와 대원들의 하나 된 기도의 힘으로 누산따라 학교 내 교회에서 예정된 나흘간의 진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번 사역에서는 이전과 다르게 모든 체어의 석션 기계와 컴프레서를 한군데로 연결해 이동 진료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효율적으로 빠른 환자 순환을 가능하게 한, 크게 향상된 방식으로 환자 수도 최초로 1,000명 가까이 되었고(961명), 진료 건수도 1,144건을 넘길 수 있었다. 진료실 하드웨어의 발전과 더불어 외과, 치주 스케일링, 보존, 소아치과, 예진, 디지털 방사선 촬영, 소독(주로 대원 자녀가 맡음)으로 각 진료 파트를 세분화하여 환자들을 효과적으로 분배한 소프트웨어적 향상도 이루어졌다. 진료실 외적으로는 양 선교사님이 환자이송 버스를 마련해 주셔서 숙소에서 진료실까지는 대원들이 이용했고, 이후에는 교통이 불편한 먼 곳에서 오는 환자들의 이송에 사용할 수 있어서 진료 실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여러 대원들의 헌신으로 어느 선교지에서처럼 현지 언론의 관심과 취재는 덤이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아무 사고 없이 일정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체력적으로는 그 어느 해보다 힘들었지만 대원 모두가 하나 되어 하늘 문이 열리고, 진료실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과 같은 체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 또한 대원 모두가 매일 아침과 취침 전 기도회, 진료 전후의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화목한 교제가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모든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세계 7대 불가사의인 보로부두르 사원을 둘러본 것과 돌아오는 길 발리에서의 짧은 하루는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때 구강외과 팀으로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바로 그해 겨울 서울대병원 구강악안면외과 전공의 및 학위 과정에 합격했고, 10년이 지난 현재 양악수술과 사랑니 발치를 주로 하고 있으니 나의 개원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에셀 팀 사역을 통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역사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올린다.  
2005년 라오스 비엔티엔 (13회) 일시: 2005년 7월 12일~18일 장소: 라오스 비엔티엔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구본찬, 이근형, 우상엽, 지혁준, 최재평, 김진욱, 정승원, 정재욱, 문현승, 박용태, 곽진희, 김지영, 백윤재, 유성훈, 양정란, 박수련, 임지인, 구권모, 이경연   백윤재 (36회 졸업, 울산CK치과병원 부원장) 본과 생활이 시작되고 해야 할 수많은 일에 치여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지만 라오스 해외진료소식을 듣고 꼭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빡빡한 생활에 동기 부여를 해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것 같다. 막연하게 동경해오던 치과 의료선교, 본과 1학년 1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다락방에 모여 용도도 제대로 모르는 어마어마한 양의 장비와 기구와 재료들을 준비할 때부터 보통 일이 아님을 실감했다. 그해 7월 12일,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으로 떠나는 여정. 직항이 없어 방콕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도착했는데, 짐의 반 이상이 도착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작은 기종의 비행기라 우리 짐을 다 못 싣는 바람에 다음날에나 받을 수 있다는 전혀 예상 못한 소식이었다. 당장 내일 오전부터 진료가 계획되어 있던 터라 많이 난감했다. 하나님은 종종 그분이 하셨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 같다. 그때마다 사람의 힘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마음을 다잡게 된다. 다음날 아침, 꽤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전 진료가 불가능했기에 번호표를 나눠주고 돌려보냈다. 감사하게도 짐이 오전에 잘 도착하고 신속히 세팅이 되어 오후부터는 진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짐 하나하나부터 모든 일정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관해주시길 기도했다. 처음 참여하는 해외진료라서 그랬는지 사실 그 정도로 힘들 줄은 예상 못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더운 날씨, 에어컨도 없고, 체어도 불편한 열악한 환경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점심 한 시간을 빼고는 9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진료하는 일이 정말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본과 1학년이 소독하고 엑스레이를 찍으며 어시스트하는 것도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진료하는 선생님들은 어떠셨을까. 안 해도 될 고생인데 사서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씨씨따낙 군립병원에서 진료하는 3일 동안 우리가 본 환자가 700명이 넘었다니 정말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종교의 자유는 있지만 외국인이 포교활동을 할 수 없는 나라였기에 비록 직접 복음을 전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의 치료를 통해, 우리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넷째 날은 라오스 한인교회로 장소를 옮겨 전체 인구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현지인 크리스천들과 한인 등 80여 명을 대상으로 진료하게 되었다. 이 곳 라오미션센터는 NGO 승인을 받아 비교적 안정적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사역에 우리의 힘을 보태고 싶었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은 수많은 고리로 구성된 쇠사슬 같다고 한다. 그 마음을 움직이기까지 많은 영향이 작용하는 가운데 라오스에서 만난 많은 분들께 우리의 섬김이 첫째 고리가 될지, 중간 고리가 될지, 아니면 마지막 고리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분명 미약하게나마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이 생겼다. 해외 진료를 위한 준비부터 진료를 마무리하는 일정까지 참 많은 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했고,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역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을 위한 공부인지 잘 알지 못했던 본과 1학년에게, 막연하게 동경해오던 치과 의료선교를 통해 생생한 현장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귀하게 사용하는 맛, 결코 달지만은 않지만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을 진하게 느끼는 참맛을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 일을 위해 만나게 하신 에셀 선후배, 동기들과의 돈독한 관계도 선물로 주셨다. 앞으로도 에셀을 통한 치과 의료사역이 더욱 발전하고,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에셀 대원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경험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2004년 미얀마 양곤 (12회) 일시: 2004년 7월 12일~18일 장소: 미얀마 양곤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김성오 교수, 임문우, 구본찬, 이성준, 구본진, 박광희, 김경석, 김영재, 이석우, 이윤섭, 류윤경, 김지희, 문현승, 양정란, 김미리, 김영민, 임지인   구본찬 (14회 졸업, 펜실베이니아치과 원장) 진료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진료실을 나오는데 아이들 몇이 뛰어 놀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 보여주니 하나 둘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디지털 카메라의 작은 모니터를 보기 위해 아이들은 아예 내게 몸을 기댔다. 그 중 한 녀석의 머리가 내게 닿았다. 순간 걱정이 되었다. ‘머릿니라도 옮으면 어쩌지?’ 다음 순간 아이의 팔이 내게 닿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며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이내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가슴 뭉클함이 밀려왔다. 임문우 선생님의 권유로 2002년 처음 해외선교에 따라나선 내게 미얀마는 태국, 남아공에 이은 세 번째 선교지였다. 목적지는 수도인 양곤 근처 낀마린 지역. 아침이면 차창 밖으로 보이던 탁발승의 행렬, 눈빛이 살아있어 실세로 보이던 군복 차림의 장교들, 여느 동남아 국가들처럼 수많은 오토바이와 열대 과일이 풍성했던 시장이 인상적이었다. 진료 장소까지 버스가 들어가지 못했는데, 스콜이 쏟아지면 길이 온통 진흙탕으로 변해 힘들게 이동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일정을 마치고 떠날 때, 빗소리가 듣기 좋았던 어둑어둑해진 진료실에서 우리를 마주보며 불러주었던 미얀마 어린 학생들의 찬양은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모든 선교 일정이 끝난 마지막 날, 모두들 치마 비슷한 옷을 둘러 입고 들른 쉐다곤 파고다. 한쪽에서 대포를 쏘아도 반대편에서는 들리지 않는다는 거대한 사원이었다. 진짜 금으로 쌓아 올린 첨탑에는 온갖 보석이 가득해 국가에 돈이 필요하면 이곳에서 빌려온다고 했다. 에셀 해외선교 역사에서 이때 처음으로 일명 마방과(마취-방사선과)를 신설하고, 다른 전문과목도 본격적으로 구분해 진료했던 때가 아닌가 싶다. 진단, 마-방, 보존, 치주, 외과 파트로 매우 효율적이었고, 각자의 경험도 더 쉽게 쌓여 이후 거의 치과병원 수준으로 발전하는 큰 개선의 밑바탕이 되었던 기억이다. 나는 태국에서 팔라우까지 10년 동안 선교여행에 동참을 했다. 그간 개인적으로 얻은 유익은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내 병원으로부터의 자유다. 처음 선교를 갈 땐 몹시 불안했다. 거의 열흘이나 병원을 비운다? 개원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다 큰 타격을 받지는 않을까? 그러나 열 번의 해외선교를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로 인한 경영의 어려움을 겪은 일이 없다. 이제 조금 더 여유 있게 스케줄 조정을 하고 있을 정도로 선교여행의 경험은 많은 조급증을 없애 주었다. 둘째는 아이들의 선교 동참. 두 자녀 권모와 예모는 번갈아가며 선교에 동참했다. 아이들에겐 선교와 봉사의 의미, 그리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었고, 그렇게 힘든데도 나중엔 서로 가려고 다투기까지 했다. 어린아이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어엿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셋째는 하나님 나라의 확신이다. 우리가 다닌 그 많은 나라에서 따뜻한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자비량으로 함께 사역한 백형선 교수님을 비롯한 선후배와 학생들, 그리고 대원 자녀에 이르기까지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귀한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던 것도 큰 선물이었다. 지금도 다정한 그 얼굴들이 그립고 보고 싶다. 또 이 순간에도 소명에 순종해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사역을 감당하는 수많은 선교사님들... 모두를 통해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임을 느끼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귀한 우리의 몸이 그동안 배운 지식과 경험, 그리고 마련한 장비로 또 다른 귀한 누군가의 몸을 치료했던 2004년의 열두 번째 에셀 미얀마 해외진료는 멀리 떨어져 언어도 삶의 방식도 다른 그곳에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체험한 시간이었다. 그 돕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사역을 가능하게 해준 학생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특별히 감사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훌륭한 지체였음에 또한 감사드린다.  
200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루스텐버그 (11회) 일시: 2003년 7월 12일~19일 장소: 남아프리카 공화국 루스텐버그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김성오 교수, 임문우, 구본찬, 박영진, 이성준, 지혁준, 안광석, 김경석, 김영재, 오민석, 김민규, 최재평, 도레미, 이석우, 이윤섭, 이현정, 정덕희, 한윤범, 정지양, 이규환   김성오 (18회 졸업, 연세대 치과대학 소아치과학교실 교수) 남아공에서의 사역은 내가 치과대학으로 발령받고 처음으로 참여한 에셀의 해외 진료이다. 학생 때는 에셀을 통해 여름과 겨울에 농어촌 전도활동과 무의촌 진료에 참여했는데, 대학 졸업 후 수련 받고 군대를 다녀오면서 참여를 못하게 되었다. 90년대 중반, 백형선 교수님이 해외진료를 시작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한 번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회를 찾던 중에 다시 학교로 들어오면서 에셀 모임에서 말씀 선생님도 자원했고, 해외진료에도 자원해 동참하게 되었다. 에셀에 대한 사랑과 열의가 졸업 후에도 남아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학생 때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루스텐버그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는 조성수 선교사님이 우리 학교에 오셔서 백형선 교수님을 만나 면담한 후에 사역지가 결정됐다. 백 교수님은 해외진료를 위해 출발 몇 달 전부터 기도회를 인도하셨고, 일주일 전부터는 매일 기도회를 했다. 또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며 필요한 사항들을 알려주셨다. 학생들도 열심히 참여하고 준비했는데, 참여자 명단 작성, 여권 리스트 작성, 세관 통과를 위한 장비 리스트 점검, 진료에 필요한 약품 정리 등 제반사항들을 챙겼다. 졸업생으로 임문우, 박영진, 이근형 선생님이 필요한 기구와 장비들을 점검해 주셨는데, 당시 이석우 학생이 의료원에서 약품을 수령할 방법을 알려주어 세브란스병원 내 의료선교센터의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출발 전에 다락방과 의료원 양쪽에서 파송예배를 드리며 분주한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새로 회장이 된 이윤섭 군과 진료부장 이석우, 정덕희, 이현정, 도레미, 김지희 등 학생이 주축이 되어 밤늦게까지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아프리카에 에이즈 환자가 많다고 해서 특별히 바늘에 찔리지 않도록 캡을 씌우는 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지금까지 에셀 팀이 가본 지역 중 가장 먼 곳으로 싱가포르를 경유해 비행기만 20시간 가까이 타야 했는데, 남반구라서 우리는 7월이었지만 그곳은 겨울이었다. 비행 도중 백형선 교수님이 쓰러지셔서 대원들이 놀라기도 했다. 다행히 스튜어디스의 기지와, 구강악안면외과 수련 중이던 오민석 선생의 응급처치 시행으로 다행히 계속 비행을 하실 수 있었다. 우리는 먼저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해 역사박물관을 방문했다. 백인에게 인종차별을 받았던 현지인들의 아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루스텐버그 메리팅 지역 선교사님의 사역지로 이동 중 인근의 흑인 빈민가 판자촌을 보게 되었는데, 전기와 수도도 없이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 살고 있었다. 도착한 사역지의 커뮤니티 홀에 장비를 풀고, 숙소인 선교사님의 선교센터에서 도착예배를 드린 뒤 휴식을 취했다. 둘째 날, 아침 QT를 하고 진료 장소로 이동해 장비를 설치하고 진료를 시작했다. 시술하는 의사와 돕는 학생이 손발을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는 달랐지만, 서로 표정과 눈빛만 보아도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치료를 대기하던 환자들 중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오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임문우 선생님은 선교사님에게 부탁해 오렌지와 바나나를 하나씩 나누어주기도 했다. 셋째 날에는 프리토리아 한국대사관에서 영사님 두 분과 함께 영광교회 소속 교민들이 정성껏 손수 만드신 김밥을 싸서 격려 방문을 해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우리는 남아공에서 황송하게 김밥을 점심으로 먹으며 진료에 임할 수 있었다. 치료를 받은 어떤 흑인 남성은 즉석에서 이를 치료받는 그림을 에이프런에 그려서 선물로 주었는데, 그 그림에 쓴 “아픈 이를 치료해줘서 고맙습니다.”라는 감사의 메시지에서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진료 중에 박영진 선생님이 BGM으로 기타 연주와 함께 복음성가를 불러주었고, 흑인 아이들에게 찬송가도 가르쳐 주었는데, 진료에 임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힘이 되는 은혜로운 찬양이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또 한 가지, 늦은 오후에는 구본찬 선생님이 흑인들과 함께 “신자 되기 원합니다.”라는 찬송가를 합창했던 일도 기억난다. 흑인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음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배운 찬송가를 즉석에서 아름다운 화음으로 부르니 무척 아름답고 감동적인 선율이 되었다. 진료 도중 컴프레서가 고장 나는 사고가 있었다. 우리가 가져간 것은 의료용으로 특수 제작되어, 압축공기에 기름이 나오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우연히 선교사님이 건물에서 오일레스 컴프레서를 발견해 바로 투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장비가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이었다. 당연히 진료 효율도 높아져서 환자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나중에 한국에서도 오일레스 컴프레서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금까지 13년 동안이나 강력하고 효과적인 오일레스 컴프레서를 중앙집중식으로 설치해 치과병원 수준의 효율적인 운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료 후에는 매일 평가회를 가졌다. 그날 있었던 일들, 다음날 더 잘하기 위해 준비할 것들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웃사랑의 사역을 우리 모두가 몸과 마음을 다해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이곳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끼시는지 알 수 있었다. 환자에게 입 크게 하라고 부탁하던 현지어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탐마!” (크게 아~ 하세요.) 평가회가 끝날 때는 졸업 선배님들이 잔잔하게 감동적인 기도를 돌아가며 해주셔서 후배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취침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 날은 현지관광을 했다. 선시티의 놀이동산 같은 곳에서 관광을 하고 사파리 투어도 했다. 사파리가 너무 넓어 동물을 몇 마리 구경 못했는데, 나중에 집결지에 모여 기다리고 있을 때, 큰 사슴이 바로 옆에서 나뭇잎 먹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깜짝 놀란 기억이있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가 아니기를 다행이었다. 나는 예과 2학년이던 1987년 가을에 에셀에 들어왔다. 중고등학교 시절이 하나님의 실존을 굳게 믿고 지낸 시절이었다면, 나의 대학생활 초기는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에 대한 물음으로 방황하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에셀에 들어온 해에 박경준 선배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를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쭉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지내왔다. 직장을 바꾸고 이사를 갈 때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고, 여기 치과대학의 교직에 있게 된 것조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분께서 존재하시기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감사드리며,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가 늘 함께 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