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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우즈베키스탄 앙그렌 (5회)
일시: 1997년 7월 17일~23일
장소: 우즈베키스탄 앙그렌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정돈영, 임문우, 이성준, 구본진, 강창수, 김성태, 김영국, 지혁준, 이재익, 박성헌, 권병기, 지성훈, 유현정, 신윤희
김성태 (25회 졸업,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치주과 교수)
벌써 20년 전, 매우 더웠던 여름으로 기억에 남는 우즈베키스탄의 안그렌이라는 도시. 학생 때와 수련의 과정 중 참여했던 선교지들 중에서 더위 때문에 오후에 2시간 정도 쉬는 시간이 있었던 곳은 여기가 유일했다. 그 시간만큼 저녁 진료는 더 늦게 끝났지만. 쉬는 시간 중 온도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당시 수련의였던 이성준 선배는 마당에 물을 뿌리기도 했다. 그걸 보면서 서로 웃고 대화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뿌리기로 사막의 열기가 별로 식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선후배간의 화기애애함으로 즐겁게 더위를 이긴 것 같다.
백형선 교수님은 진료실의 위생이 걱정되어 파리를 쫓아내고 잡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해주셨고, 화장실의 위생을 위해 여러 번 소독약을 부으며 힘써 주셨다. 덕분에 자칫 발생할 수 있는 위생 문제의 위험도 크게 줄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 때문에 우리 팀원 중 김영국 선배는 탈진으로 수액을 맞으면서까지 진료를 완수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아쉽게 마지막 날 관광지는 함께 가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젊은 날의 열정과 우리의 순수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에피소드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셔서 무사히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모두가 매우 지친 일정이었지만 늘 하는 아침 경건의 시간과 주일날 특송을 위한 찬양연습으로 영적인 힘을 공급 받았다. 우리 내부에서 영적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환경이 어려울 때 많은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아침마다 영적인 충전의 시간이 필수적이다. 현재 보스턴에서 개원한 이재익 원장은 찬양의 은사가 있어서 우리의 특송 연습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돌이켜보면 여러 해에 걸친 해외선교 과정에서 임문우 선배님이 미국 생활과 유학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많은 동기부여를 해주신 것 같아 참으로 감사하다. 그 당시 학생이었던 나를 포함해 이희제, 윤준호, 구본진, 이석원 선배님, 서예준, 이재익 등이 모두 졸업 후 미국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공부와 시험응시를 통해 각자 맡은 곳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나는 미국으로 장기연수를 와 있는데, 이곳에 있는 에셀 선후배들과 연락하고 만날 때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여전히 식지 않은 선교에 대한 열정도 확인할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마지막 날 회식으로 많은 대원들이 복통에 시달렸지만 나는 다른 곳에 문제가 있었다. 더운 날씨에 끊임없이 땀은 흐르는데, 제때 샤워를 못하고 계속 진료를 해야 했기 때문에 피부가 맞닿는 팔오금 부위에 접촉성 피부병이 생긴 것이다. 진물이 나고 통증이 있어서 고생을 좀 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잘 치료를 받고 회복되었다. 피부과 진료를 받으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팔오금이 이렇게 되었느냐고 의사가 묻기에 우즈베키스탄의 엄청난 더위에 대해 한참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는 참 열심히 일했던 것 같다. 그 엄청난 더위만큼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과 온전히 함께 한 여름이었다.
1996년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4회)
일시: 1996년 7월 10일~17일
장소: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강창수, 구본진, 윤준호, 이희재, 김성태, 김영국, 권병기, 권주현, 박성헌, 이재익, 문수정, 박수현, 장선희, 최은희, 송윤희, 심지영, 손승룡
임문우 (12회 졸업, 임문우치과 원장)
벌써 만 20년이나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때 내 나이 서른여섯. 백형선 선생님도 40대 중반으로 가장 활력 넘치게 일하실 때였다. 러시아는 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5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극동 지역인 하바롭스크에서 이미 적지 않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활동 중이었다. 자신이 믿었던 체제의 붕괴 속에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처한 러시아 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교회에서 후원하는 남 선교사님과 연결이 되었다. 러시아... 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안 되던 곳이다. 불과 13년 전, KAL 007기가 폭파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생긴 소련의 영해였기 때문이다. 소련은 무너졌다지만, 냉전 기간에 쌓인 다량의 핵을 실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넘쳐나는 러시아는 여전히 과거에 소련이었던 그 나라였다. 막연한 공포심이 마음 한구석에 깔려 있었는데, 나만 그랬을까? 아무튼 내 염려는 하바롭스크에 내리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제복 차림의 군인 같은 세관원들이 우리 장비를 하나씩 풀어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소독 처리된 기구와 거즈를 뜯고, 각종 장비를 그 더러운 손으로 꺼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손짓 발짓으로 말렸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더 의심스러웠는지 다 꺼내 치과 기구라는 것을 확인했다. 덕분에 그 기구들은 다 다시 소독을 해야 했고, 거즈는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경제 상황과 함께 치안 상태도 매우 안 좋았다. 아파트를 비롯한 모든 집은 이중 삼중으로 철문을 걸어 잠그게 되어 있었고, 심지어 자동차도 개인 컨테이너를 마련해 안에 넣고 굵은 자물쇠로 매번 잠글 정도였다. 풍요롭게 배급되던 음식은 옛말이고, 거의 모두 자급자족으로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의료 환경은 더욱 열악했다. 기초적인 의약품조차 턱없이 부족해서 우리 대원들이 응급상황에 쓰려고 가져간 약품들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사용되었다. 심하게 눈이 충혈된 어린아이가 각막염에 걸린 것처럼 보였는데,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테라마이신 안연고조차 없어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가 가져간 약으로 치료해 줄 수 있었다. 남은 안연고를 달라고 했었는데, 또 필요할지 몰라서 주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후회가 된다.
첫 진료는 한 고려인 댁에서 했는데, 좁고 통풍이 안 되는 한증막 같아서 비지땀을 흘리며 쭈그리고 진료하느라 전 대원들이 고생을 했다. 두 번째 진료소는 마을회관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는 회관 관리자가 자기가 원하는 사람부터 진료를 해 달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그때만 해도 해외 선교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 그냥 열심히 진료해 주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밤 11시까지 저녁식사도 미루고 일했던 것이 기억난다. 아마 에셀 사역
중 가장 늦게까지 진료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환자까지 진료하는 모습을 본 관리자는 한국이 왜 성공하고 발전하는지 당신들을 보니 알겠다는 얘기를 했다.
사실 우리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자기 시간과 비용을 들여 남을 도우러 이 먼 땅에 오는 것도 이상한데, 조직이나 일이야 어찌 되든 칼퇴근하는 문화에 익숙한 그들로서는 정해진 시간을 넘긴 것은 둘째 치고, 한 사람도 불평하지 않고 저녁도 거른 채 11시까지 진료하는 모습이 혀를 내두를 만한 것이 틀림없었으리라. 언어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르지만 성실함과 최선의 모습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심신은 지쳤지만 기쁜 마음이었다.
러시아 하면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맛있는 빵이다. 경제적 여건도 좋지 않아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은 아니었지만 거칠고 못 생긴 외형에 비해 정말 맛있는 빵들이 많았다. 백 선생님이 빵을 좋아하시는데 그때 아침에 제공되는 빵들을 참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24년간 다닌 지역 중에 가장 맛난 빵을 드신 곳을 꼽으라면 아마 하바롭스크를 떠올리지 않으실까. 빵으로 만든 맥주 ‘크바스’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국민 음료였다.
그 다음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체로 잘생겼다는 것이다. 동부 러시아는 미인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어서 다른 지역에서도 배우자감을 찾으러 일부러 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소문대로 미인들이 많았다. 어린아이들도 ‘걸어 다니는 인형’ 같았는데, 뭐니 뭐니 해도 10대 소녀들이 가장 아름다웠다. 얼마나 예뻤는지 함께 간 치과대학생들은 국제결혼을 (자기 혼자)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현지 선교사님과 아는 16세의 아리따운 러시아 소녀들이 있었는데, 나한테 조용히 와서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내 착각이었을지는 몰라도, 내가 혹시 총각이 아닌가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내가 너희의 두 배 하고도 몇 살이나 더 많다고 말했더니, 그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짓고는 이내 사라졌다.
그다음으로는 치대 남학생 둘에게 관심을 가졌다. 나중에 이 소녀들은 우리가 떠나기 전 공항에서 그 행운아들과 같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는데, 그때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지금은 그들도 원장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잘 키우고 있지만, 아마 지금처럼 국제결혼이 흔한 시절이었다면 러시아 소녀들과 결혼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토록 인형 같던 소녀들도 이제는 30대 중반의 뚱뚱한 러시아 아줌마들이 되어 있겠지?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1995년 말레이시아 사라왁 (3회)
일시: 1995년 7월 31일~8월 8일
장소: 말레이시아 사라왁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조기수, 이기주, 우상엽, 이종석, 편무성, 한승훈, 조항래, 구본진, 이석원, 이희재, 김선희, 손승룡, 김판구, 권소영
이기주 (20회 졸업, 연세덴티프로치과 원장)
사라왁은 밀림과 목재로 유명한 보르네오 섬의 한 주(州)이다. 식인 풍습을 가진 이반족이 살았던 곳으로 외세침략과 종족간의 전쟁이 많았던 질곡의 역사를 거쳤지만, 밀림과 동물들이 서식하는 태고의 원시림이 보존된 지역이었다. 이반족은 사라왁 최대의 종족으로 옛날부터 용맹스럽기로 유명했다. 이들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사람을 사냥했다고 하는데, 특히 적의 목을 많이 벤 전사를 좋아했다. 그 전통으로 이반족이 사는 집에는 사람의 해골이 걸려 있다. 그들은 주로 밀림 강변에 일명 ‘롱하우스’라고 불리는 긴 집을 짓고 집단으로 거주한다. 롱하우스는 10가구 이상이 함께 생활하도록 지은 공동주택이다. 집을 지을 때도 공평하게 일을 분담하고, 사용하는 공간도 균등하게 나눈다. 집의 규모는 대략 길이 100m, 폭 20m 내외이며 훨씬 더 긴 집도 있다고 한다.
호전적인 이반족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생전 처음 경험하는 밀림이라는 고립되고 열악한 환경에서의 진료라서 더욱 철저한 준비를 했다. 먼저 먼 곳에서 이반족을 품고 사역하시는 신 선교사님이 많은 것을 준비해 주셨기 때문에 부족한 우리지만 주님께서 감당할 능력을 주시리라는 빌립보서 4장 13절의 믿음을 가졌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허술한 준비나 이동 중 발생할 수 있는 물품 분실은 사역에 치명적일 수 있는데, 이번 일정은 공항에서 차로 이동 후 다시 밀림까지 통나무배로 이동, 1차 진료 후 다시 배와 차를 타고 이동해 2차 진료를 해야 했다. 두 번의 장비 이동과 진료지 세팅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더욱이 밀림에서 대체 장비나 재료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한층 더 철저한 준비와 관리가 필요했다.
말로만 듣던 밀림은 덥고 습하며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열악하며 낙후돼 있었다. 어둠이 내리면 고요와 적막 그 자체였다. 후텁지근한 더위와 각종 벌레를 견뎌야 했고, 몇 대 안 되는 선풍기도 제대로 돌릴 수 없는 전력수급 상황에 깨끗한 물이 충분치 않아 최소한만 씻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입에 잘 맞지 않는 향신료와 부족한 식사도 어려움을 더했다. 주로 차와 비스킷만으로 간단히 식사하는 이반족이지만 특별히 손님을 대접한다며 밀림에서 귀한 쌀을 많이 준비해 준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우리에게는 당연하고 보잘것없는 것일 수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값지고 특별하다는 사실을 통해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였다.
그들은 마음이 따스하고 순진하며, 풍족함과 여유가 느껴지는 사람들이었다. 우리와의 만남이 용맹한 전사의 후예와 낙후되고 빈곤한 현실 사이의 절망감에 빠져있는 이반족이 주님을 만나고 영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열악한 환경과 장거리 이동으로 모두가 지치고 한계를 느꼈었지만, 그들에게 무언가 베풀고 있다는 보람과 즐거움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자 은혜임을 알게 되었다. 믿음과 간구를 통해 어려울수록 지혜를 주시고, 힘들수록 더 이길 힘을 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다.
이쯤에서 ‘고뇌파’의 일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진료가 끝난 저녁, 원주민들이 사냥을 하고 돌아와 모여 있는 곳에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임문우, 조기수 선배, 우상엽 후배 등과 함께 가 보았다. 그때 그곳에서 그들이 건네는 고슴도치의 특별 부위를 맛보게 되었다. 영영 잊을 수 없는 비릿한 맛의 경험...그때가 바로 고뇌파, 즉 ‘고슴도치 뇌를 맛본 에셀인’의 모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시를 떠올리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고, 어떤 힘든 일도 해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다.
주님의 깊은 뜻과 한량없는 은혜는 다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사역이 이반족의 삶에 좋은 기억과 구원의 계기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그들과 작별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온 우리 마음속에도 더 좋은 것을 남기셨음을 믿는다. 그것을 앞으로도 면면히 이어질 우리 에셀의 전통으로 만드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한다.
1994년 중국 연변 (2회)
일시: 1994년 7월 19일~28일
장소: 중국 연변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정영철, 김인달, 우상엽, 이성준, 이언강, 허영렬, 편무성, 한승훈, 구본진, 류현진, 김수연, 김경혜, 김영일 교수, 손승룡
허영렬 (22회 졸업, 연세미소래치과 원장)
얼마 전 중국 내에 있는 북한식당에서 종업원들이 탈출해 남한으로 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20여 년 전 본과 4학년 시절의 여름이 떠올랐다. 학창시절 에셀을 통한 갖가지 경험과 수많은 만남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기에 모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1994년 여름의 색다른 경험은 아직까지도 아주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1994년 여름, 바쁜 원내생 시절에 백형선 교수님과 개원 중이신 임문우 선배님, 그리고 말씀을 전해주시던 손승룡 전도사님과 함께 연길로 진료봉사를 떠났다. 중국과의 수교가 얼마 되지 않았고 중국으로의 직항편도 없었을 때라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호기심으로 조금 흥분이 되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연변과학기술대학 기숙사에 머물며 장소를 옮겨가며 진료를 했다.
지금은 나아졌겠지만 당시 중국의 치과 수준은 많이 떨어져서 마취 후에 통증없이 발치를 해준다는 소문에 진료장소에 도착하면 아침부터 이미 40~50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치 기구가 모자라 소독하느라 힘이 들었고, 아무리 해도 줄지 않는 대기환자 행렬에 속옷까지 땀으로 흥건했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이 우리 민족인 조선족이기에 한 분이라도 더 치료해드리기 위해 열심히 하루하루를 보냈다.
당시 진료는 대양치재 대표 장현양 사장님이 만든 이동식 치과유닛을 소망교회 후원으로 학교에 기증을 하고, 다른 진료팀들이 와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세팅하는 역할을 우리가 하게 되어서 익숙하지는 않지만 환자를 체계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곳은 대학이기 때문에 젊은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 대학생들이 MT때 주로 하는 게임을 준비해서 함께 놀아주기도 했는데, 그때만 해도 중국 사회가아직 세계화가 많이 되지 않아서인지 큰 환호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하루는 오후 진료를 마치고 연길 시내에 있는 북한식당을 다함께 방문했는데, 대동강을 포함한 평양 시내를 그린 큰 벽화와 더불어 북한식 한복차림에 미모의 종업원이 우리를 맞아주는 것이 아닌가!! 테이블에 앉은 일행은 ‘남남북녀’ 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느끼면서, 기념사진이라도 찍으려고 약간 소란을 떨며 카메라를 그 여인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고조 여기서리 촬영을 하시면, 내래 사진기를 압수하갔슴다.” 북한식 억양이 가득한 말투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김일성이 사망한 지 얼마 안 된 때라 출국 전에도 걱정을 많이 했던 기억이다. 여종업원의 포스에도 우리 모두가 움찔했던 것은, 공산국가 방문에 대한 부담과 아직 상중인 기간에 혹시 생길 수 있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는 식당의 다른 손님이 그 직원을 ‘정동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북한식 억양을 흉내 내며 그 날의 피로를 풀기도 했다.
진료 일정 후에 버스를 타고 백두산에 가본 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특히 일반적인 여행처럼 천지를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걸어 올라가서 직접 발을 담가 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천지 반대편이 바로 같은 민족의 땅이었지만 너무나 이질화된 북한 지역이라는 것도 당시에는 훨씬 더 안타깝게 와 닿았다.
에셀 팀에서 학창시절 선후배와 함께 했던 수많은 경험이 있지만, 농촌전도와 더불어 해외진료의 경험은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단기간에 선후배가 한마음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엄숙하기만한 종교모임이 아닌 가족 같은 끈끈한 정으로 마음과 마음을 이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1993년 필리핀 (1회)
일시: 1993년 7월 25일~31일
장소: 필리핀 타를라크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백철우, 이석민, 이봉진, 안재열, 우상엽, 구본진, 이석원, 장명호 목사, 최동환 목사, 손승룡, 조문상 교수, 최철수, 김기홍, 정지수, 이현승
우상엽 (22회 졸업, 디자인치과 원장)
응답하라 1993... 본과 3년인 나에게는 일복이 터진 해로 기억된다. 매년 농촌으로 여름 진료를 갔는데 하필이면 내가 첫 진료부장이 되던 해에 해외로 간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동기인 허영렬, 이언강, 이성준, 나 이렇게 넷이 열심 멤버였는데, 나를 뺀 나머지는 모두 유럽 배낭여행을 간다고 했다. 오, 주여..... 결국 외롭게 혼자 진료준비를 해야만 했다. 당시 레지던트 3년차였던 백철우 선배님이 백형선 교수님을 모시는 수련의로 가셨기 때문에 일할 사람은 본과 3학년인 나뿐이었다.
모든 것이 다 새로웠다. 짐을 어떻게 싸야 하는지, 통관을 어떻게 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라 모두 알아보아야 했다. 당시 치과의료선교회에서 해외 치과 진료를 해본 경험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광화문에 있는사무실로 찾아가 물었던 기억이 난다. 발치겸자와 각각의 기구들을 소독해서 가져가야 하고, 사용이 쉽게 천을 제작해야 한다고 구강외과 박광호 교수님이 조언을 주셔서 동대문으로 천을 맞추러 갔던 기억도 난다.
모든 기구와 물품 리스트도 다 영어로 정리하고 김포공항 출국 1주일 전, 통관을 위한 리스트를 제출해야 한다고 해서 2년 후배인 구본진과 엄청나게 고생을 하며 작성했다. 나의 3학년 여름방학은 이렇게 해외진료 준비로 시작해서 선교 여행으로 끝났다. 나도 배낭여행 핑계로 빠져 볼까 생각도 했지만 본과 1학년 때 이미 갔다 온 상태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도 동기들과 후배들이 도와주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어찌어찌 출발 당일이 되었다.
그런데 출국하는 주일 날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실질적으로 준비를 가장 많이 했던 레지던트 3년차 백철우 선배는 육군 방위 출신이고, 난 군 면제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출국하려면 동사무소에 가서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헉....!!!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었는데.....’ 공항 안에 임시 동사무소가 있었지만 주일이라 문을 닫았다고..... 결국 나와
철우 형은 그날 출발을 못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오후 비행기를 탈 준비를 하는데 눈이 침침한 게 좀 이상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바로 안과에 갔더니.... 글쎄, 아폴로 눈병이라나....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반드시 수건은 따로 쓰라면서 푹 쉬어야 낫는다고 한다. “오늘 오후에 비행기로 필리핀 가서 의료봉사 해야 하는데요!” 안과의사가 나더러 미쳤다고 한다. 하지만 주님의 뜻으로 믿고 나는 떠났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눈병을 전염시키지 않고 잘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게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걸려본 아폴로 눈병이었다. 가기 전부터 이런 해프닝들 있었으니 가서는 오죽 많았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이 다 사탄의 방해 공작이었다고 생각된다. 첫 해외선교 사역이었으니 더욱 심하지 않았을까.
필리핀에서의 일들은 백 교수님이 앞에 잘 써주셨으니 비하인드 스토리만 적어본다. 진료 장소는 도시빈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파타산의 교회였다. 좁은 건물은 창문도 없이 다 열려 있었고 전등도 마땅치 않아 전선을 근처 고압선에서 따다가 연결한 긴 형광등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두 번째 진료지는 화산 폭발 이재민촌이었다. 이곳에서의 일들은 평생 나를 미소 짓게 만드는 나만의 소중한 추억이다. 산 위에 덩그러니 모아 놓은 초가집들이 난민촌의 실제 모습이다. 내 것을 거저 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잊히지 않는다. 아이들의 부모도 우리도 그저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했다. 환자 대기실과 진료실 구분이 없는 좁은 초가집에서 맨발의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바닥도 전부 흙바닥이었다.
장비를 지켜야 해서 철우 형과 나만 창문도 벽도 없는 교회에서 잠을 잤다. 그런 경험을 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무서움과 재미가 혼재했던 하룻밤이었다. 이른 새벽, 선잠을 깼는데 너무 출출해서 컵라면을 먹으려고 하는데 물을 끓일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 그때 자불소독기가 눈에 띄었다. 피가 많이 묻은 기구를 끓이는 스팀 통인데, 웬만한 비위로는 이것으로 음식을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거기에 물을 끓였다. 그리고 맛있게 먹으려는 찰나... 커다란 눈망울로 우리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물을 머금고, 어금니를 악문 채 우리는 딱 한 젓가락만 입에 대보고 아이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지금 돌아보면 어떤 섭리와 인도하심이 확실히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각자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모든 것이 첫 경험이었지만 모두가 하나님이 만드신 형상이라는 생각으로 성실히 진료하려고 아등바등 힘을 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갔던 첫 해외 치과 의료선교.... 그 시작이 24년이나 이어지고 나서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20대와 30~40대를 살아오면서 남들도 인정해주고 나에게도 떳떳한,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리고 싶다. 앞으로도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묵묵히 수행해 나갈 것을 다짐하며, 귀한 추억의 펜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