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루스텐버그 (11회)
작성자
yonseiessel
작성일
2023-08-23 19:59
조회
357
일시: 2003년 7월 12일~19일
장소: 남아프리카 공화국 루스텐버그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김성오 교수, 임문우, 구본찬, 박영진, 이성준, 지혁준, 안광석, 김경석, 김영재, 오민석, 김민규, 최재평, 도레미, 이석우, 이윤섭, 이현정, 정덕희, 한윤범, 정지양, 이규환
김성오 (18회 졸업, 연세대 치과대학 소아치과학교실 교수)
남아공에서의 사역은 내가 치과대학으로 발령받고 처음으로 참여한 에셀의 해외 진료이다. 학생 때는 에셀을 통해 여름과 겨울에 농어촌 전도활동과 무의촌 진료에 참여했는데, 대학 졸업 후 수련 받고 군대를 다녀오면서 참여를 못하게 되었다. 90년대 중반, 백형선 교수님이 해외진료를 시작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한 번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회를 찾던 중에 다시 학교로 들어오면서 에셀 모임에서 말씀 선생님도 자원했고, 해외진료에도 자원해 동참하게 되었다. 에셀에 대한 사랑과 열의가 졸업 후에도 남아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학생 때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루스텐버그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는 조성수 선교사님이 우리 학교에 오셔서 백형선 교수님을 만나 면담한 후에 사역지가 결정됐다. 백 교수님은 해외진료를 위해 출발 몇 달 전부터 기도회를 인도하셨고, 일주일 전부터는 매일 기도회를 했다. 또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며 필요한 사항들을 알려주셨다. 학생들도 열심히 참여하고 준비했는데, 참여자 명단 작성, 여권 리스트 작성, 세관 통과를 위한 장비 리스트 점검, 진료에 필요한 약품 정리 등 제반사항들을 챙겼다.
졸업생으로 임문우, 박영진, 이근형 선생님이 필요한 기구와 장비들을 점검해 주셨는데, 당시 이석우 학생이 의료원에서 약품을 수령할 방법을 알려주어 세브란스병원 내 의료선교센터의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출발 전에 다락방과 의료원 양쪽에서 파송예배를 드리며 분주한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새로 회장이 된 이윤섭 군과 진료부장 이석우, 정덕희, 이현정, 도레미, 김지희 등 학생이 주축이 되어 밤늦게까지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아프리카에 에이즈 환자가 많다고 해서 특별히 바늘에 찔리지 않도록 캡을 씌우는 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지금까지 에셀 팀이 가본 지역 중 가장 먼 곳으로 싱가포르를 경유해 비행기만 20시간 가까이 타야 했는데, 남반구라서 우리는 7월이었지만 그곳은 겨울이었다. 비행 도중 백형선 교수님이 쓰러지셔서 대원들이 놀라기도 했다. 다행히 스튜어디스의 기지와, 구강악안면외과 수련 중이던 오민석 선생의 응급처치 시행으로 다행히 계속 비행을 하실 수 있었다.
우리는 먼저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해 역사박물관을 방문했다. 백인에게 인종차별을 받았던 현지인들의 아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루스텐버그 메리팅 지역 선교사님의 사역지로 이동 중 인근의 흑인 빈민가 판자촌을 보게 되었는데, 전기와 수도도 없이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 살고 있었다. 도착한 사역지의 커뮤니티 홀에 장비를 풀고, 숙소인 선교사님의 선교센터에서 도착예배를 드린 뒤 휴식을 취했다.
둘째 날, 아침 QT를 하고 진료 장소로 이동해 장비를 설치하고 진료를 시작했다. 시술하는 의사와 돕는 학생이 손발을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는 달랐지만, 서로 표정과 눈빛만 보아도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치료를 대기하던 환자들 중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오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임문우 선생님은 선교사님에게 부탁해 오렌지와 바나나를 하나씩 나누어주기도 했다.
셋째 날에는 프리토리아 한국대사관에서 영사님 두 분과 함께 영광교회 소속 교민들이 정성껏 손수 만드신 김밥을 싸서 격려 방문을 해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우리는 남아공에서 황송하게 김밥을 점심으로 먹으며 진료에 임할 수 있었다. 치료를 받은 어떤 흑인 남성은 즉석에서 이를 치료받는 그림을 에이프런에 그려서 선물로 주었는데, 그 그림에 쓴 “아픈 이를 치료해줘서 고맙습니다.”라는 감사의 메시지에서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진료 중에 박영진 선생님이 BGM으로 기타 연주와 함께 복음성가를 불러주었고, 흑인 아이들에게 찬송가도 가르쳐 주었는데, 진료에 임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힘이 되는 은혜로운 찬양이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또 한 가지, 늦은 오후에는 구본찬 선생님이 흑인들과 함께 “신자 되기 원합니다.”라는 찬송가를 합창했던 일도 기억난다. 흑인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음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배운 찬송가를 즉석에서 아름다운 화음으로 부르니 무척 아름답고 감동적인 선율이 되었다.
진료 도중 컴프레서가 고장 나는 사고가 있었다. 우리가 가져간 것은 의료용으로 특수 제작되어, 압축공기에 기름이 나오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우연히 선교사님이 건물에서 오일레스 컴프레서를 발견해 바로 투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장비가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이었다. 당연히 진료 효율도 높아져서 환자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나중에 한국에서도 오일레스 컴프레서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금까지 13년 동안이나 강력하고 효과적인 오일레스 컴프레서를 중앙집중식으로 설치해 치과병원 수준의 효율적인 운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료 후에는 매일 평가회를 가졌다. 그날 있었던 일들, 다음날 더 잘하기 위해 준비할 것들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웃사랑의 사역을 우리 모두가 몸과 마음을 다해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이곳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끼시는지 알 수 있었다. 환자에게 입 크게 하라고 부탁하던 현지어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탐마!” (크게 아~ 하세요.) 평가회가 끝날 때는 졸업 선배님들이 잔잔하게 감동적인 기도를 돌아가며 해주셔서 후배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취침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 날은 현지관광을 했다. 선시티의 놀이동산 같은 곳에서 관광을 하고 사파리 투어도 했다. 사파리가 너무 넓어 동물을 몇 마리 구경 못했는데, 나중에 집결지에 모여 기다리고 있을 때, 큰 사슴이 바로 옆에서 나뭇잎 먹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깜짝 놀란 기억이있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가 아니기를 다행이었다.
나는 예과 2학년이던 1987년 가을에 에셀에 들어왔다. 중고등학교 시절이 하나님의 실존을 굳게 믿고 지낸 시절이었다면, 나의 대학생활 초기는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에 대한 물음으로 방황하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에셀에 들어온 해에 박경준 선배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를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쭉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지내왔다.
직장을 바꾸고 이사를 갈 때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고, 여기 치과대학의 교직에 있게 된 것조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분께서 존재하시기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감사드리며,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가 늘 함께 하기를 바란다.
장소: 남아프리카 공화국 루스텐버그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김성오 교수, 임문우, 구본찬, 박영진, 이성준, 지혁준, 안광석, 김경석, 김영재, 오민석, 김민규, 최재평, 도레미, 이석우, 이윤섭, 이현정, 정덕희, 한윤범, 정지양, 이규환
김성오 (18회 졸업, 연세대 치과대학 소아치과학교실 교수)
남아공에서의 사역은 내가 치과대학으로 발령받고 처음으로 참여한 에셀의 해외 진료이다. 학생 때는 에셀을 통해 여름과 겨울에 농어촌 전도활동과 무의촌 진료에 참여했는데, 대학 졸업 후 수련 받고 군대를 다녀오면서 참여를 못하게 되었다. 90년대 중반, 백형선 교수님이 해외진료를 시작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한 번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회를 찾던 중에 다시 학교로 들어오면서 에셀 모임에서 말씀 선생님도 자원했고, 해외진료에도 자원해 동참하게 되었다. 에셀에 대한 사랑과 열의가 졸업 후에도 남아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학생 때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루스텐버그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는 조성수 선교사님이 우리 학교에 오셔서 백형선 교수님을 만나 면담한 후에 사역지가 결정됐다. 백 교수님은 해외진료를 위해 출발 몇 달 전부터 기도회를 인도하셨고, 일주일 전부터는 매일 기도회를 했다. 또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며 필요한 사항들을 알려주셨다. 학생들도 열심히 참여하고 준비했는데, 참여자 명단 작성, 여권 리스트 작성, 세관 통과를 위한 장비 리스트 점검, 진료에 필요한 약품 정리 등 제반사항들을 챙겼다.
졸업생으로 임문우, 박영진, 이근형 선생님이 필요한 기구와 장비들을 점검해 주셨는데, 당시 이석우 학생이 의료원에서 약품을 수령할 방법을 알려주어 세브란스병원 내 의료선교센터의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출발 전에 다락방과 의료원 양쪽에서 파송예배를 드리며 분주한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새로 회장이 된 이윤섭 군과 진료부장 이석우, 정덕희, 이현정, 도레미, 김지희 등 학생이 주축이 되어 밤늦게까지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아프리카에 에이즈 환자가 많다고 해서 특별히 바늘에 찔리지 않도록 캡을 씌우는 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지금까지 에셀 팀이 가본 지역 중 가장 먼 곳으로 싱가포르를 경유해 비행기만 20시간 가까이 타야 했는데, 남반구라서 우리는 7월이었지만 그곳은 겨울이었다. 비행 도중 백형선 교수님이 쓰러지셔서 대원들이 놀라기도 했다. 다행히 스튜어디스의 기지와, 구강악안면외과 수련 중이던 오민석 선생의 응급처치 시행으로 다행히 계속 비행을 하실 수 있었다.
우리는 먼저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해 역사박물관을 방문했다. 백인에게 인종차별을 받았던 현지인들의 아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루스텐버그 메리팅 지역 선교사님의 사역지로 이동 중 인근의 흑인 빈민가 판자촌을 보게 되었는데, 전기와 수도도 없이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 살고 있었다. 도착한 사역지의 커뮤니티 홀에 장비를 풀고, 숙소인 선교사님의 선교센터에서 도착예배를 드린 뒤 휴식을 취했다.
둘째 날, 아침 QT를 하고 진료 장소로 이동해 장비를 설치하고 진료를 시작했다. 시술하는 의사와 돕는 학생이 손발을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는 달랐지만, 서로 표정과 눈빛만 보아도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치료를 대기하던 환자들 중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오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임문우 선생님은 선교사님에게 부탁해 오렌지와 바나나를 하나씩 나누어주기도 했다.
셋째 날에는 프리토리아 한국대사관에서 영사님 두 분과 함께 영광교회 소속 교민들이 정성껏 손수 만드신 김밥을 싸서 격려 방문을 해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우리는 남아공에서 황송하게 김밥을 점심으로 먹으며 진료에 임할 수 있었다. 치료를 받은 어떤 흑인 남성은 즉석에서 이를 치료받는 그림을 에이프런에 그려서 선물로 주었는데, 그 그림에 쓴 “아픈 이를 치료해줘서 고맙습니다.”라는 감사의 메시지에서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진료 중에 박영진 선생님이 BGM으로 기타 연주와 함께 복음성가를 불러주었고, 흑인 아이들에게 찬송가도 가르쳐 주었는데, 진료에 임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힘이 되는 은혜로운 찬양이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또 한 가지, 늦은 오후에는 구본찬 선생님이 흑인들과 함께 “신자 되기 원합니다.”라는 찬송가를 합창했던 일도 기억난다. 흑인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음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배운 찬송가를 즉석에서 아름다운 화음으로 부르니 무척 아름답고 감동적인 선율이 되었다.
진료 도중 컴프레서가 고장 나는 사고가 있었다. 우리가 가져간 것은 의료용으로 특수 제작되어, 압축공기에 기름이 나오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우연히 선교사님이 건물에서 오일레스 컴프레서를 발견해 바로 투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장비가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이었다. 당연히 진료 효율도 높아져서 환자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나중에 한국에서도 오일레스 컴프레서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금까지 13년 동안이나 강력하고 효과적인 오일레스 컴프레서를 중앙집중식으로 설치해 치과병원 수준의 효율적인 운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료 후에는 매일 평가회를 가졌다. 그날 있었던 일들, 다음날 더 잘하기 위해 준비할 것들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웃사랑의 사역을 우리 모두가 몸과 마음을 다해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이곳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끼시는지 알 수 있었다. 환자에게 입 크게 하라고 부탁하던 현지어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탐마!” (크게 아~ 하세요.) 평가회가 끝날 때는 졸업 선배님들이 잔잔하게 감동적인 기도를 돌아가며 해주셔서 후배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취침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 날은 현지관광을 했다. 선시티의 놀이동산 같은 곳에서 관광을 하고 사파리 투어도 했다. 사파리가 너무 넓어 동물을 몇 마리 구경 못했는데, 나중에 집결지에 모여 기다리고 있을 때, 큰 사슴이 바로 옆에서 나뭇잎 먹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깜짝 놀란 기억이있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가 아니기를 다행이었다.
나는 예과 2학년이던 1987년 가을에 에셀에 들어왔다. 중고등학교 시절이 하나님의 실존을 굳게 믿고 지낸 시절이었다면, 나의 대학생활 초기는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에 대한 물음으로 방황하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에셀에 들어온 해에 박경준 선배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를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쭉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지내왔다.
직장을 바꾸고 이사를 갈 때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고, 여기 치과대학의 교직에 있게 된 것조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분께서 존재하시기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감사드리며,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가 늘 함께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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