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태국 치앙라이 (10회)
작성자
yonseiessel
작성일
2023-08-23 19:43
조회
357
일시: 2002년 7월 10일~17일
장소: 태국 치앙라이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이근형, 지혁준, 지성훈, 김두형, 서예준, 김경석, 정회훈, 이동우, 조혜영, 정 완, 김민석, 김민형, 나혜원, 황선아, 김영희, 임지인
이근형 (16회 졸업, 이근형치과 원장)
너무나 치열한 한 해였다. 개원한지 10년차, 전쟁을 치르듯 살아온 날들…. 어느 날 환자와 씨름하는 많이 지친 내 모습이 보이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문우 형이 에셀 해외 선교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나도 따라 갈 수 있는지 물었다. 학생 때 함께했던 말레이시아 사라왁에서의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진료 사역 과정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부탁을 드렸는데 다행히 기회를 얻어 동행하게 되었다. 처음 가보는 태국 치앙마이에 도착해 다시 치앙라이로 이동했다. 관악구에서 개원 중 안식년을 스스로 챙기시며 태국에서 치과진료로 사역하고 있는 이혁 선배를 만나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도착해서 확인한 진료지 환경은 열악했다. 라후족을 대상으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을 도와 라후족 사람들과 산지족들을 데려다 진료를 하게 되었다. 산지족은 언어가 달라 또 다른 통역이 필요했다.
숙소로 선교센터 내부를 활용하다가 너무 답답해서 아예 진료를 했던 교회 안에서 자게 되었다. 백 교수님을 바닥에 모실 수가 없어서 강단 쪽으로 배려했던 기억이 있다. 다음날 아침, 자다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는데,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나 나올법한 커다란 지네가 내 가슴 위를 횡단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세수는 작은 수돗가밖에 없어서 여학생들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진료 여건도 열악했는데, 보존치료는 특히 성에 차지 않았다. 진료 장소를 교실로 이동한 뒤로는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다. 아주 조금.
지금은 추억이지만 꽤나 힘든 여건이었다. 특히 식사는 아무거나 잘 먹는 나조차 적응이 어려워서, 백 교수님 사모님이 만들어주신 수제 고기볶음 고추장이 없었다면 식사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커다랗고 맑은 눈을 가진 아이들을 치료한 경험은 정말이지 잊히지 않는다. 눈이 어찌나 큰지 아이들이 워낙 작아서 눈이 더 커 보이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언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도화지처럼 맑은 눈동자... 그곳 어른들의 초점 잃은 눈과 대비가 되어보였다.
귀국하는 날, 그 지역에서 제일 유명한 사찰을 관광하게 되었다. 예전 우리나라의 국도 같은 태국 고속도로를 거쳐 도착했는데, 조용한 우리나라 사찰과는 많이 달랐다. 저녁은 그간의 식사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뷔페에서 만찬을 나누었다. 하지만 식사를 제대로 못한 날들이 길어서인지 밥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비행기는 본진과 떨어져 다음날 귀국했다.
장소: 태국 치앙라이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이근형, 지혁준, 지성훈, 김두형, 서예준, 김경석, 정회훈, 이동우, 조혜영, 정 완, 김민석, 김민형, 나혜원, 황선아, 김영희, 임지인
이근형 (16회 졸업, 이근형치과 원장)
너무나 치열한 한 해였다. 개원한지 10년차, 전쟁을 치르듯 살아온 날들…. 어느 날 환자와 씨름하는 많이 지친 내 모습이 보이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문우 형이 에셀 해외 선교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나도 따라 갈 수 있는지 물었다. 학생 때 함께했던 말레이시아 사라왁에서의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진료 사역 과정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부탁을 드렸는데 다행히 기회를 얻어 동행하게 되었다. 처음 가보는 태국 치앙마이에 도착해 다시 치앙라이로 이동했다. 관악구에서 개원 중 안식년을 스스로 챙기시며 태국에서 치과진료로 사역하고 있는 이혁 선배를 만나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도착해서 확인한 진료지 환경은 열악했다. 라후족을 대상으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을 도와 라후족 사람들과 산지족들을 데려다 진료를 하게 되었다. 산지족은 언어가 달라 또 다른 통역이 필요했다.
숙소로 선교센터 내부를 활용하다가 너무 답답해서 아예 진료를 했던 교회 안에서 자게 되었다. 백 교수님을 바닥에 모실 수가 없어서 강단 쪽으로 배려했던 기억이 있다. 다음날 아침, 자다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는데,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나 나올법한 커다란 지네가 내 가슴 위를 횡단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세수는 작은 수돗가밖에 없어서 여학생들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진료 여건도 열악했는데, 보존치료는 특히 성에 차지 않았다. 진료 장소를 교실로 이동한 뒤로는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다. 아주 조금.
지금은 추억이지만 꽤나 힘든 여건이었다. 특히 식사는 아무거나 잘 먹는 나조차 적응이 어려워서, 백 교수님 사모님이 만들어주신 수제 고기볶음 고추장이 없었다면 식사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커다랗고 맑은 눈을 가진 아이들을 치료한 경험은 정말이지 잊히지 않는다. 눈이 어찌나 큰지 아이들이 워낙 작아서 눈이 더 커 보이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언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도화지처럼 맑은 눈동자... 그곳 어른들의 초점 잃은 눈과 대비가 되어보였다.
귀국하는 날, 그 지역에서 제일 유명한 사찰을 관광하게 되었다. 예전 우리나라의 국도 같은 태국 고속도로를 거쳐 도착했는데, 조용한 우리나라 사찰과는 많이 달랐다. 저녁은 그간의 식사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뷔페에서 만찬을 나누었다. 하지만 식사를 제대로 못한 날들이 길어서인지 밥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비행기는 본진과 떨어져 다음날 귀국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난생처음 하늘에 가득한 은하수와 별빛을 보게 하셨고, 무엇보다 선하고 맑은 아이들의 눈빛을 보게 하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하도록 에셀과의 만남을 허락하시고 동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많은 진료에도 한 번의 사고 없이 저희 모두를 항상 지켜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희 모두의 삶에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눌 기회를 허락해 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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