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4회)
작성자
yonseiessel
작성일
2023-08-21 12:09
조회
354
일시: 1996년 7월 10일~17일
장소: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강창수, 구본진, 윤준호, 이희재, 김성태, 김영국, 권병기, 권주현, 박성헌, 이재익, 문수정, 박수현, 장선희, 최은희, 송윤희, 심지영, 손승룡
임문우 (12회 졸업, 임문우치과 원장)
벌써 만 20년이나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때 내 나이 서른여섯. 백형선 선생님도 40대 중반으로 가장 활력 넘치게 일하실 때였다. 러시아는 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5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극동 지역인 하바롭스크에서 이미 적지 않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활동 중이었다. 자신이 믿었던 체제의 붕괴 속에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처한 러시아 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교회에서 후원하는 남 선교사님과 연결이 되었다. 러시아... 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안 되던 곳이다. 불과 13년 전, KAL 007기가 폭파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생긴 소련의 영해였기 때문이다. 소련은 무너졌다지만, 냉전 기간에 쌓인 다량의 핵을 실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넘쳐나는 러시아는 여전히 과거에 소련이었던 그 나라였다. 막연한 공포심이 마음 한구석에 깔려 있었는데, 나만 그랬을까? 아무튼 내 염려는 하바롭스크에 내리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제복 차림의 군인 같은 세관원들이 우리 장비를 하나씩 풀어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소독 처리된 기구와 거즈를 뜯고, 각종 장비를 그 더러운 손으로 꺼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손짓 발짓으로 말렸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더 의심스러웠는지 다 꺼내 치과 기구라는 것을 확인했다. 덕분에 그 기구들은 다 다시 소독을 해야 했고, 거즈는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경제 상황과 함께 치안 상태도 매우 안 좋았다. 아파트를 비롯한 모든 집은 이중 삼중으로 철문을 걸어 잠그게 되어 있었고, 심지어 자동차도 개인 컨테이너를 마련해 안에 넣고 굵은 자물쇠로 매번 잠글 정도였다. 풍요롭게 배급되던 음식은 옛말이고, 거의 모두 자급자족으로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의료 환경은 더욱 열악했다. 기초적인 의약품조차 턱없이 부족해서 우리 대원들이 응급상황에 쓰려고 가져간 약품들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사용되었다. 심하게 눈이 충혈된 어린아이가 각막염에 걸린 것처럼 보였는데,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테라마이신 안연고조차 없어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가 가져간 약으로 치료해 줄 수 있었다. 남은 안연고를 달라고 했었는데, 또 필요할지 몰라서 주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후회가 된다.
첫 진료는 한 고려인 댁에서 했는데, 좁고 통풍이 안 되는 한증막 같아서 비지땀을 흘리며 쭈그리고 진료하느라 전 대원들이 고생을 했다. 두 번째 진료소는 마을회관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는 회관 관리자가 자기가 원하는 사람부터 진료를 해 달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그때만 해도 해외 선교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 그냥 열심히 진료해 주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밤 11시까지 저녁식사도 미루고 일했던 것이 기억난다. 아마 에셀 사역
중 가장 늦게까지 진료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환자까지 진료하는 모습을 본 관리자는 한국이 왜 성공하고 발전하는지 당신들을 보니 알겠다는 얘기를 했다.
사실 우리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자기 시간과 비용을 들여 남을 도우러 이 먼 땅에 오는 것도 이상한데, 조직이나 일이야 어찌 되든 칼퇴근하는 문화에 익숙한 그들로서는 정해진 시간을 넘긴 것은 둘째 치고, 한 사람도 불평하지 않고 저녁도 거른 채 11시까지 진료하는 모습이 혀를 내두를 만한 것이 틀림없었으리라. 언어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르지만 성실함과 최선의 모습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심신은 지쳤지만 기쁜 마음이었다.
러시아 하면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맛있는 빵이다. 경제적 여건도 좋지 않아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은 아니었지만 거칠고 못 생긴 외형에 비해 정말 맛있는 빵들이 많았다. 백 선생님이 빵을 좋아하시는데 그때 아침에 제공되는 빵들을 참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24년간 다닌 지역 중에 가장 맛난 빵을 드신 곳을 꼽으라면 아마 하바롭스크를 떠올리지 않으실까. 빵으로 만든 맥주 ‘크바스’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국민 음료였다.
그 다음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체로 잘생겼다는 것이다. 동부 러시아는 미인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어서 다른 지역에서도 배우자감을 찾으러 일부러 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소문대로 미인들이 많았다. 어린아이들도 ‘걸어 다니는 인형’ 같았는데, 뭐니 뭐니 해도 10대 소녀들이 가장 아름다웠다. 얼마나 예뻤는지 함께 간 치과대학생들은 국제결혼을 (자기 혼자)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현지 선교사님과 아는 16세의 아리따운 러시아 소녀들이 있었는데, 나한테 조용히 와서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내 착각이었을지는 몰라도, 내가 혹시 총각이 아닌가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내가 너희의 두 배 하고도 몇 살이나 더 많다고 말했더니, 그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짓고는 이내 사라졌다.
그다음으로는 치대 남학생 둘에게 관심을 가졌다. 나중에 이 소녀들은 우리가 떠나기 전 공항에서 그 행운아들과 같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는데, 그때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지금은 그들도 원장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잘 키우고 있지만, 아마 지금처럼 국제결혼이 흔한 시절이었다면 러시아 소녀들과 결혼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토록 인형 같던 소녀들도 이제는 30대 중반의 뚱뚱한 러시아 아줌마들이 되어 있겠지?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장소: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강창수, 구본진, 윤준호, 이희재, 김성태, 김영국, 권병기, 권주현, 박성헌, 이재익, 문수정, 박수현, 장선희, 최은희, 송윤희, 심지영, 손승룡
임문우 (12회 졸업, 임문우치과 원장)
벌써 만 20년이나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때 내 나이 서른여섯. 백형선 선생님도 40대 중반으로 가장 활력 넘치게 일하실 때였다. 러시아는 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5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극동 지역인 하바롭스크에서 이미 적지 않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활동 중이었다. 자신이 믿었던 체제의 붕괴 속에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처한 러시아 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교회에서 후원하는 남 선교사님과 연결이 되었다. 러시아... 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안 되던 곳이다. 불과 13년 전, KAL 007기가 폭파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생긴 소련의 영해였기 때문이다. 소련은 무너졌다지만, 냉전 기간에 쌓인 다량의 핵을 실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넘쳐나는 러시아는 여전히 과거에 소련이었던 그 나라였다. 막연한 공포심이 마음 한구석에 깔려 있었는데, 나만 그랬을까? 아무튼 내 염려는 하바롭스크에 내리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제복 차림의 군인 같은 세관원들이 우리 장비를 하나씩 풀어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소독 처리된 기구와 거즈를 뜯고, 각종 장비를 그 더러운 손으로 꺼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손짓 발짓으로 말렸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더 의심스러웠는지 다 꺼내 치과 기구라는 것을 확인했다. 덕분에 그 기구들은 다 다시 소독을 해야 했고, 거즈는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경제 상황과 함께 치안 상태도 매우 안 좋았다. 아파트를 비롯한 모든 집은 이중 삼중으로 철문을 걸어 잠그게 되어 있었고, 심지어 자동차도 개인 컨테이너를 마련해 안에 넣고 굵은 자물쇠로 매번 잠글 정도였다. 풍요롭게 배급되던 음식은 옛말이고, 거의 모두 자급자족으로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의료 환경은 더욱 열악했다. 기초적인 의약품조차 턱없이 부족해서 우리 대원들이 응급상황에 쓰려고 가져간 약품들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사용되었다. 심하게 눈이 충혈된 어린아이가 각막염에 걸린 것처럼 보였는데,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테라마이신 안연고조차 없어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가 가져간 약으로 치료해 줄 수 있었다. 남은 안연고를 달라고 했었는데, 또 필요할지 몰라서 주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후회가 된다.
첫 진료는 한 고려인 댁에서 했는데, 좁고 통풍이 안 되는 한증막 같아서 비지땀을 흘리며 쭈그리고 진료하느라 전 대원들이 고생을 했다. 두 번째 진료소는 마을회관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는 회관 관리자가 자기가 원하는 사람부터 진료를 해 달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그때만 해도 해외 선교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 그냥 열심히 진료해 주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밤 11시까지 저녁식사도 미루고 일했던 것이 기억난다. 아마 에셀 사역
중 가장 늦게까지 진료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환자까지 진료하는 모습을 본 관리자는 한국이 왜 성공하고 발전하는지 당신들을 보니 알겠다는 얘기를 했다.
사실 우리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자기 시간과 비용을 들여 남을 도우러 이 먼 땅에 오는 것도 이상한데, 조직이나 일이야 어찌 되든 칼퇴근하는 문화에 익숙한 그들로서는 정해진 시간을 넘긴 것은 둘째 치고, 한 사람도 불평하지 않고 저녁도 거른 채 11시까지 진료하는 모습이 혀를 내두를 만한 것이 틀림없었으리라. 언어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르지만 성실함과 최선의 모습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심신은 지쳤지만 기쁜 마음이었다.
러시아 하면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맛있는 빵이다. 경제적 여건도 좋지 않아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은 아니었지만 거칠고 못 생긴 외형에 비해 정말 맛있는 빵들이 많았다. 백 선생님이 빵을 좋아하시는데 그때 아침에 제공되는 빵들을 참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24년간 다닌 지역 중에 가장 맛난 빵을 드신 곳을 꼽으라면 아마 하바롭스크를 떠올리지 않으실까. 빵으로 만든 맥주 ‘크바스’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국민 음료였다.
그 다음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체로 잘생겼다는 것이다. 동부 러시아는 미인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어서 다른 지역에서도 배우자감을 찾으러 일부러 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소문대로 미인들이 많았다. 어린아이들도 ‘걸어 다니는 인형’ 같았는데, 뭐니 뭐니 해도 10대 소녀들이 가장 아름다웠다. 얼마나 예뻤는지 함께 간 치과대학생들은 국제결혼을 (자기 혼자)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현지 선교사님과 아는 16세의 아리따운 러시아 소녀들이 있었는데, 나한테 조용히 와서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내 착각이었을지는 몰라도, 내가 혹시 총각이 아닌가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내가 너희의 두 배 하고도 몇 살이나 더 많다고 말했더니, 그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짓고는 이내 사라졌다.
그다음으로는 치대 남학생 둘에게 관심을 가졌다. 나중에 이 소녀들은 우리가 떠나기 전 공항에서 그 행운아들과 같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는데, 그때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지금은 그들도 원장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잘 키우고 있지만, 아마 지금처럼 국제결혼이 흔한 시절이었다면 러시아 소녀들과 결혼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토록 인형 같던 소녀들도 이제는 30대 중반의 뚱뚱한 러시아 아줌마들이 되어 있겠지?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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