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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나무 에셀

1999년 아제르바이잔 에이블라 (7회)

작성자
yonseiessel
작성일
2023-08-22 18:03
조회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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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1999년 7월 11일~18일
장소: 아제르바이잔 에이블라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구본진, 김성태, 지혁준, 박성헌, 지성훈, 서예준, 김성현, 고형준, 강민재, 오민석, 박민나, 한지연, 강숙정, 권유림, 임지인



















지혁준 (25회 졸업, 키즈엔젤치과 원장)

아제르바이잔은 불의 나라이다. 성경에도 그렇게 표현되고 있는 아주 오래된 나라로 산유국이며 대부분이 무슬림이다.18 우리는 이 나라로 가기 위해 특별히 많은 준비를 하며 가슴을 졸였었다. 장기간 이동에 따른 화물비를 아끼려고 미리 선박으로 장비의 대부분을 보냈는데, 현지에서 장비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낯선 나라로 선교를 다니다 보면 항상 예상 못한 변수들이 나타나서 마지막 장비를 찾을 때까지 열심히 기도를 하곤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갈 때는 당시 모스크바로 러시아 국적의 항공기를 탔고, 경비 절감을 위해 비자를 받아 시내로 나가는 대신 모스크바 공항 바로 옆에 있는 트랜스퍼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외부와 고립된 상태였고, 잘사는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감옥이 이런 형태일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 같다. 다중의 문들 때문에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 없었고, 같은 층의 휴게실만이 우리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당시 구소련은 개방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촌스러운 분위기였다. 다음날 감옥(?)에서 나온 우리는 근처에 있는 다른 청사로 이동을 해서 아제르바이잔으로 날아갔다. 엄청 맛없는 샌드위치를 기내식으로 먹으면서.... 바쿠 공항에는 현지 사역 중인 백제현 선교사님과 다른 두 명의 여선교사님이 나와 계셨는데 모두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첫날은 미리 보낸 장비를 찾기 위해 항구 세관으로 가서 반나절 정도를 보낸 것 같다. 구름이 낀 건조한 날씨로 제법 더웠지만, 그늘로 가면 뜨겁지는 않았다. 짐을 찾은 우리는 곧바로 에이블라 난민촌으로 향했는데 이곳은 차로 약 1시간 정도 떨어져 있었다. 넓은 유목지대와 모래밭 같은 평지를 계속 달려 허허벌판에 세워진 난민촌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에 전쟁의 흔적 같은 고철덩어리들을 지평선 부근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난민촌에서 우리는 천막으로 만든 공간에 내일의 진료를 위한 장비를 설치했는데, 당시 이란에서 피난 온 치과의사가 있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 분은 처음에는 통역으로 도와주다가 치료도 같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인생에서 처음 만나보는 난민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고립된 채로 생활하고 있었으며, 예상대로 대부분이 심각한 구강 내 질환을 앓고 있었다. 오랜 피난길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기다리거나 줄을 서고 질서를 지키는 일에 익숙하지 않고, 쉽게 흥분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치료보다는 발치 위주의 진료를 주로 했는데, 치아의 뿌리만 남아 있는 환자가 많았다. 생각보다 진료가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3일 동안 난민촌으로 출퇴근을 했고 마지막 날에는 바쿠 시내의 현지 교회 내에서 교인들 위주의 진료를 하는 것으로 아제르바이잔에서의 일정을 마쳤다.바쿠에서의 마지막 진료를 마치고 저녁은 시내에서 현지 음식을 먹었는데 식사를 하면서 벨리댄스 비슷한 전통 춤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현지에서 사역을 하던 스웨덴 자매님과 핀란드 가족 분들도 합류했는데, 이 분들도 우리를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셨었다.

마지막 날 오전에 잠깐 관광을 하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도착하고 보니 당시 본과 4학년이었던 김성현을 관광지에 놓고 그냥 우리끼리만 온 것이 아닌가! 일행이 많다 보니 전체가 다 있겠거니 하고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다. 다행히 성현이가 혼자 택시를 타고 손짓발짓 설명으로 공항에 나타났지만 그때의 당혹감은 오랫동안 강하게 남은 아제르바이잔에서의 기억 중 하나이다.

이후로는 진료팀 전 대원이 고유번호를 받아 모일 때마다 번호를 부르고 맨 마지막 번호가 끝나야만 이동을 하는 전통이 세워졌다. 안타까웠던 일은 우리가 귀국 후에 바쿠의 교회가 정부 탄압으로 폐쇄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17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일들이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글을 쓰다 보니 또 많은 추억이 여전히 내 머릿속에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게 이런 은혜가 충만한 경험을 가능케 하신 우리 주님께 감사드린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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