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9회)
작성자
yonseiessel
작성일
2023-08-23 18:30
조회
36

일시: 2001년 7월 10일~7월 17일
장소: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지혁준, 지성훈, 김두형, 박성헌, 김경석, 김재욱, 김영재, 방난심, 안현철, 최형준, 김민형, 이동우, 정회훈, 조혜영, 나혜원, 홍수정, 황현정










이동우 (30회 졸업, 연세웰키즈치과 원장)
내가 키르기스스탄 진료 봉사에 참여했을 때는 본과 3학년이었다. 벌써 15년이 지나서 솔직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처음에 나라 이름을 들었을 때는, 무슨 ‘스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중앙아시아 어디쯤에 있는 나라일 텐데, 도대체 뭐하는 나라인지 궁금했다. 그 때는 네이버도 생긴 지 얼마 안 되고 인터넷에 자료가 별로 없어서 선교사님이 보내주신 자료로 대략적인 것만 알고 가야 했고, 현지에서 정보를 많이 얻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료 준비를 하는 데도 어려운 점이 많았다. 지금이야 에셀이 굉장히 부흥해서 많은 후배들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재학생 전체가 본과 3학년에 나와 회훈이 형, 4학년의 형준이 형과 영재 형, 재욱이 형... 이렇게 다 해도 5명이니 규모가 아주 작았다. 그래서 해외 진료를 준비하면서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당시 한창 바쁠 때인데도 본과 4학년 형들이 열심히 준비해 주시고 수련 중인 선배님들도 많이 도와주셔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가는 항공편도 직항이 없어서 우즈베키스탄에서 하루 머물러 갔다. 그때 쓰던 치과유닛용 컴프레서가 까만 서류가방 형태였는데, 이게 상당히 무겁고 파손 위험이 있어서 직접 들고 다니느라 애먹었던 기억도 난다. 현지에서의 숙소는 선교사님의 배려로 지금의 펜션 같은 느낌에 아담하고 깨끗한 곳이었고, 기후도 덥지만 건조해서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하니 감사뿐이었다. 진료에는 아주 많은 분들이 오셔서 정신없이 돌아갔고, 마지막 환자분이 돌아가면 다들 녹초가 되었지만, 마음은 보람과 기쁨으로 가득한 정말 귀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키르기스스탄 진료 봉사의 대미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은, 마지막 저녁 식사로 현지 분이 대접한 양고기였다. 큰 양을 몰고 와서 모두가 보는 데서 잡았는데, 전혀 저항 없이 순종하는 모습을 보며 예정된 죽음 앞에 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양을 잡아 다 같이 배부르게 먹었는데, 그곳 풍습은 양의 눈알 부분을 눈이 밝아지라는 의미로 제일 연장자가 먹게 되어 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백 교수님이 무척 난감해 하시면서도 드셨던 기억이 나는데, 눈이 좀 밝아지셨는지 모르겠다.
이 글을 계기로 에셀에서 활동하던 시간들을 다시 기억해 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치과 진료라는 매우 특별한 은사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 그저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이었던 것 같다. 가고 오는 길은 고단하지만 매일 진료를 무사히 마쳤을 때의 뿌듯함이란,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생생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많은 후배님들이 이런 귀한 체험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장소: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지혁준, 지성훈, 김두형, 박성헌, 김경석, 김재욱, 김영재, 방난심, 안현철, 최형준, 김민형, 이동우, 정회훈, 조혜영, 나혜원, 홍수정, 황현정










이동우 (30회 졸업, 연세웰키즈치과 원장)
내가 키르기스스탄 진료 봉사에 참여했을 때는 본과 3학년이었다. 벌써 15년이 지나서 솔직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처음에 나라 이름을 들었을 때는, 무슨 ‘스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중앙아시아 어디쯤에 있는 나라일 텐데, 도대체 뭐하는 나라인지 궁금했다. 그 때는 네이버도 생긴 지 얼마 안 되고 인터넷에 자료가 별로 없어서 선교사님이 보내주신 자료로 대략적인 것만 알고 가야 했고, 현지에서 정보를 많이 얻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료 준비를 하는 데도 어려운 점이 많았다. 지금이야 에셀이 굉장히 부흥해서 많은 후배들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재학생 전체가 본과 3학년에 나와 회훈이 형, 4학년의 형준이 형과 영재 형, 재욱이 형... 이렇게 다 해도 5명이니 규모가 아주 작았다. 그래서 해외 진료를 준비하면서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당시 한창 바쁠 때인데도 본과 4학년 형들이 열심히 준비해 주시고 수련 중인 선배님들도 많이 도와주셔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가는 항공편도 직항이 없어서 우즈베키스탄에서 하루 머물러 갔다. 그때 쓰던 치과유닛용 컴프레서가 까만 서류가방 형태였는데, 이게 상당히 무겁고 파손 위험이 있어서 직접 들고 다니느라 애먹었던 기억도 난다. 현지에서의 숙소는 선교사님의 배려로 지금의 펜션 같은 느낌에 아담하고 깨끗한 곳이었고, 기후도 덥지만 건조해서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하니 감사뿐이었다. 진료에는 아주 많은 분들이 오셔서 정신없이 돌아갔고, 마지막 환자분이 돌아가면 다들 녹초가 되었지만, 마음은 보람과 기쁨으로 가득한 정말 귀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키르기스스탄 진료 봉사의 대미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은, 마지막 저녁 식사로 현지 분이 대접한 양고기였다. 큰 양을 몰고 와서 모두가 보는 데서 잡았는데, 전혀 저항 없이 순종하는 모습을 보며 예정된 죽음 앞에 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양을 잡아 다 같이 배부르게 먹었는데, 그곳 풍습은 양의 눈알 부분을 눈이 밝아지라는 의미로 제일 연장자가 먹게 되어 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백 교수님이 무척 난감해 하시면서도 드셨던 기억이 나는데, 눈이 좀 밝아지셨는지 모르겠다.
이 글을 계기로 에셀에서 활동하던 시간들을 다시 기억해 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치과 진료라는 매우 특별한 은사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 그저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이었던 것 같다. 가고 오는 길은 고단하지만 매일 진료를 무사히 마쳤을 때의 뿌듯함이란,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생생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많은 후배님들이 이런 귀한 체험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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