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중국 연변 (2회)
작성자
yonseiessel
작성일
2023-08-15 19:07
조회
235
일시: 1994년 7월 19일~28일
장소: 중국 연변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정영철, 김인달, 우상엽, 이성준, 이언강, 허영렬, 편무성, 한승훈, 구본진, 류현진, 김수연, 김경혜, 김영일 교수, 손승룡
허영렬 (22회 졸업, 연세미소래치과 원장)
얼마 전 중국 내에 있는 북한식당에서 종업원들이 탈출해 남한으로 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20여 년 전 본과 4학년 시절의 여름이 떠올랐다. 학창시절 에셀을 통한 갖가지 경험과 수많은 만남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기에 모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1994년 여름의 색다른 경험은 아직까지도 아주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1994년 여름, 바쁜 원내생 시절에 백형선 교수님과 개원 중이신 임문우 선배님, 그리고 말씀을 전해주시던 손승룡 전도사님과 함께 연길로 진료봉사를 떠났다. 중국과의 수교가 얼마 되지 않았고 중국으로의 직항편도 없었을 때라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호기심으로 조금 흥분이 되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연변과학기술대학 기숙사에 머물며 장소를 옮겨가며 진료를 했다.
지금은 나아졌겠지만 당시 중국의 치과 수준은 많이 떨어져서 마취 후에 통증없이 발치를 해준다는 소문에 진료장소에 도착하면 아침부터 이미 40~50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치 기구가 모자라 소독하느라 힘이 들었고, 아무리 해도 줄지 않는 대기환자 행렬에 속옷까지 땀으로 흥건했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이 우리 민족인 조선족이기에 한 분이라도 더 치료해드리기 위해 열심히 하루하루를 보냈다.
당시 진료는 대양치재 대표 장현양 사장님이 만든 이동식 치과유닛을 소망교회 후원으로 학교에 기증을 하고, 다른 진료팀들이 와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세팅하는 역할을 우리가 하게 되어서 익숙하지는 않지만 환자를 체계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곳은 대학이기 때문에 젊은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 대학생들이 MT때 주로 하는 게임을 준비해서 함께 놀아주기도 했는데, 그때만 해도 중국 사회가아직 세계화가 많이 되지 않아서인지 큰 환호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하루는 오후 진료를 마치고 연길 시내에 있는 북한식당을 다함께 방문했는데, 대동강을 포함한 평양 시내를 그린 큰 벽화와 더불어 북한식 한복차림에 미모의 종업원이 우리를 맞아주는 것이 아닌가!! 테이블에 앉은 일행은 ‘남남북녀’ 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느끼면서, 기념사진이라도 찍으려고 약간 소란을 떨며 카메라를 그 여인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고조 여기서리 촬영을 하시면, 내래 사진기를 압수하갔슴다.” 북한식 억양이 가득한 말투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김일성이 사망한 지 얼마 안 된 때라 출국 전에도 걱정을 많이 했던 기억이다. 여종업원의 포스에도 우리 모두가 움찔했던 것은, 공산국가 방문에 대한 부담과 아직 상중인 기간에 혹시 생길 수 있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는 식당의 다른 손님이 그 직원을 ‘정동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북한식 억양을 흉내 내며 그 날의 피로를 풀기도 했다.
진료 일정 후에 버스를 타고 백두산에 가본 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특히 일반적인 여행처럼 천지를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걸어 올라가서 직접 발을 담가 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천지 반대편이 바로 같은 민족의 땅이었지만 너무나 이질화된 북한 지역이라는 것도 당시에는 훨씬 더 안타깝게 와 닿았다.
에셀 팀에서 학창시절 선후배와 함께 했던 수많은 경험이 있지만, 농촌전도와 더불어 해외진료의 경험은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단기간에 선후배가 한마음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엄숙하기만한 종교모임이 아닌 가족 같은 끈끈한 정으로 마음과 마음을 이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장소: 중국 연변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정영철, 김인달, 우상엽, 이성준, 이언강, 허영렬, 편무성, 한승훈, 구본진, 류현진, 김수연, 김경혜, 김영일 교수, 손승룡
허영렬 (22회 졸업, 연세미소래치과 원장)
얼마 전 중국 내에 있는 북한식당에서 종업원들이 탈출해 남한으로 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20여 년 전 본과 4학년 시절의 여름이 떠올랐다. 학창시절 에셀을 통한 갖가지 경험과 수많은 만남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기에 모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1994년 여름의 색다른 경험은 아직까지도 아주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1994년 여름, 바쁜 원내생 시절에 백형선 교수님과 개원 중이신 임문우 선배님, 그리고 말씀을 전해주시던 손승룡 전도사님과 함께 연길로 진료봉사를 떠났다. 중국과의 수교가 얼마 되지 않았고 중국으로의 직항편도 없었을 때라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호기심으로 조금 흥분이 되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연변과학기술대학 기숙사에 머물며 장소를 옮겨가며 진료를 했다.
지금은 나아졌겠지만 당시 중국의 치과 수준은 많이 떨어져서 마취 후에 통증없이 발치를 해준다는 소문에 진료장소에 도착하면 아침부터 이미 40~50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치 기구가 모자라 소독하느라 힘이 들었고, 아무리 해도 줄지 않는 대기환자 행렬에 속옷까지 땀으로 흥건했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이 우리 민족인 조선족이기에 한 분이라도 더 치료해드리기 위해 열심히 하루하루를 보냈다.
당시 진료는 대양치재 대표 장현양 사장님이 만든 이동식 치과유닛을 소망교회 후원으로 학교에 기증을 하고, 다른 진료팀들이 와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세팅하는 역할을 우리가 하게 되어서 익숙하지는 않지만 환자를 체계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곳은 대학이기 때문에 젊은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 대학생들이 MT때 주로 하는 게임을 준비해서 함께 놀아주기도 했는데, 그때만 해도 중국 사회가아직 세계화가 많이 되지 않아서인지 큰 환호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하루는 오후 진료를 마치고 연길 시내에 있는 북한식당을 다함께 방문했는데, 대동강을 포함한 평양 시내를 그린 큰 벽화와 더불어 북한식 한복차림에 미모의 종업원이 우리를 맞아주는 것이 아닌가!! 테이블에 앉은 일행은 ‘남남북녀’ 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느끼면서, 기념사진이라도 찍으려고 약간 소란을 떨며 카메라를 그 여인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고조 여기서리 촬영을 하시면, 내래 사진기를 압수하갔슴다.” 북한식 억양이 가득한 말투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김일성이 사망한 지 얼마 안 된 때라 출국 전에도 걱정을 많이 했던 기억이다. 여종업원의 포스에도 우리 모두가 움찔했던 것은, 공산국가 방문에 대한 부담과 아직 상중인 기간에 혹시 생길 수 있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는 식당의 다른 손님이 그 직원을 ‘정동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북한식 억양을 흉내 내며 그 날의 피로를 풀기도 했다.
진료 일정 후에 버스를 타고 백두산에 가본 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특히 일반적인 여행처럼 천지를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걸어 올라가서 직접 발을 담가 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천지 반대편이 바로 같은 민족의 땅이었지만 너무나 이질화된 북한 지역이라는 것도 당시에는 훨씬 더 안타깝게 와 닿았다.
에셀 팀에서 학창시절 선후배와 함께 했던 수많은 경험이 있지만, 농촌전도와 더불어 해외진료의 경험은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단기간에 선후배가 한마음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엄숙하기만한 종교모임이 아닌 가족 같은 끈끈한 정으로 마음과 마음을 이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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