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필리핀 (1회)
작성자
yonseiessel
작성일
2023-08-15 18:02
조회
494

일시: 1993년 7월 25일~31일
장소: 필리핀 타를라크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백철우, 이석민, 이봉진, 안재열, 우상엽, 구본진, 이석원, 장명호 목사, 최동환 목사, 손승룡, 조문상 교수, 최철수, 김기홍, 정지수, 이현승










우상엽 (22회 졸업, 디자인치과 원장)
응답하라 1993... 본과 3년인 나에게는 일복이 터진 해로 기억된다. 매년 농촌으로 여름 진료를 갔는데 하필이면 내가 첫 진료부장이 되던 해에 해외로 간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동기인 허영렬, 이언강, 이성준, 나 이렇게 넷이 열심 멤버였는데, 나를 뺀 나머지는 모두 유럽 배낭여행을 간다고 했다. 오, 주여..... 결국 외롭게 혼자 진료준비를 해야만 했다. 당시 레지던트 3년차였던 백철우 선배님이 백형선 교수님을 모시는 수련의로 가셨기 때문에 일할 사람은 본과 3학년인 나뿐이었다.
모든 것이 다 새로웠다. 짐을 어떻게 싸야 하는지, 통관을 어떻게 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라 모두 알아보아야 했다. 당시 치과의료선교회에서 해외 치과 진료를 해본 경험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광화문에 있는사무실로 찾아가 물었던 기억이 난다. 발치겸자와 각각의 기구들을 소독해서 가져가야 하고, 사용이 쉽게 천을 제작해야 한다고 구강외과 박광호 교수님이 조언을 주셔서 동대문으로 천을 맞추러 갔던 기억도 난다.
모든 기구와 물품 리스트도 다 영어로 정리하고 김포공항 출국 1주일 전, 통관을 위한 리스트를 제출해야 한다고 해서 2년 후배인 구본진과 엄청나게 고생을 하며 작성했다. 나의 3학년 여름방학은 이렇게 해외진료 준비로 시작해서 선교 여행으로 끝났다. 나도 배낭여행 핑계로 빠져 볼까 생각도 했지만 본과 1학년 때 이미 갔다 온 상태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도 동기들과 후배들이 도와주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어찌어찌 출발 당일이 되었다.
그런데 출국하는 주일 날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실질적으로 준비를 가장 많이 했던 레지던트 3년차 백철우 선배는 육군 방위 출신이고, 난 군 면제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출국하려면 동사무소에 가서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헉....!!!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었는데.....’ 공항 안에 임시 동사무소가 있었지만 주일이라 문을 닫았다고..... 결국 나와
철우 형은 그날 출발을 못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오후 비행기를 탈 준비를 하는데 눈이 침침한 게 좀 이상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바로 안과에 갔더니.... 글쎄, 아폴로 눈병이라나....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반드시 수건은 따로 쓰라면서 푹 쉬어야 낫는다고 한다. “오늘 오후에 비행기로 필리핀 가서 의료봉사 해야 하는데요!” 안과의사가 나더러 미쳤다고 한다. 하지만 주님의 뜻으로 믿고 나는 떠났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눈병을 전염시키지 않고 잘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게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걸려본 아폴로 눈병이었다. 가기 전부터 이런 해프닝들 있었으니 가서는 오죽 많았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이 다 사탄의 방해 공작이었다고 생각된다. 첫 해외선교 사역이었으니 더욱 심하지 않았을까.
필리핀에서의 일들은 백 교수님이 앞에 잘 써주셨으니 비하인드 스토리만 적어본다. 진료 장소는 도시빈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파타산의 교회였다. 좁은 건물은 창문도 없이 다 열려 있었고 전등도 마땅치 않아 전선을 근처 고압선에서 따다가 연결한 긴 형광등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두 번째 진료지는 화산 폭발 이재민촌이었다. 이곳에서의 일들은 평생 나를 미소 짓게 만드는 나만의 소중한 추억이다. 산 위에 덩그러니 모아 놓은 초가집들이 난민촌의 실제 모습이다. 내 것을 거저 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잊히지 않는다. 아이들의 부모도 우리도 그저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했다. 환자 대기실과 진료실 구분이 없는 좁은 초가집에서 맨발의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바닥도 전부 흙바닥이었다.
장비를 지켜야 해서 철우 형과 나만 창문도 벽도 없는 교회에서 잠을 잤다. 그런 경험을 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무서움과 재미가 혼재했던 하룻밤이었다. 이른 새벽, 선잠을 깼는데 너무 출출해서 컵라면을 먹으려고 하는데 물을 끓일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 그때 자불소독기가 눈에 띄었다. 피가 많이 묻은 기구를 끓이는 스팀 통인데, 웬만한 비위로는 이것으로 음식을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거기에 물을 끓였다. 그리고 맛있게 먹으려는 찰나... 커다란 눈망울로 우리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물을 머금고, 어금니를 악문 채 우리는 딱 한 젓가락만 입에 대보고 아이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지금 돌아보면 어떤 섭리와 인도하심이 확실히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각자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모든 것이 첫 경험이었지만 모두가 하나님이 만드신 형상이라는 생각으로 성실히 진료하려고 아등바등 힘을 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갔던 첫 해외 치과 의료선교.... 그 시작이 24년이나 이어지고 나서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20대와 30~40대를 살아오면서 남들도 인정해주고 나에게도 떳떳한,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리고 싶다. 앞으로도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묵묵히 수행해 나갈 것을 다짐하며, 귀한 추억의 펜을 놓는다.
장소: 필리핀 타를라크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백철우, 이석민, 이봉진, 안재열, 우상엽, 구본진, 이석원, 장명호 목사, 최동환 목사, 손승룡, 조문상 교수, 최철수, 김기홍, 정지수, 이현승










우상엽 (22회 졸업, 디자인치과 원장)
응답하라 1993... 본과 3년인 나에게는 일복이 터진 해로 기억된다. 매년 농촌으로 여름 진료를 갔는데 하필이면 내가 첫 진료부장이 되던 해에 해외로 간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동기인 허영렬, 이언강, 이성준, 나 이렇게 넷이 열심 멤버였는데, 나를 뺀 나머지는 모두 유럽 배낭여행을 간다고 했다. 오, 주여..... 결국 외롭게 혼자 진료준비를 해야만 했다. 당시 레지던트 3년차였던 백철우 선배님이 백형선 교수님을 모시는 수련의로 가셨기 때문에 일할 사람은 본과 3학년인 나뿐이었다.
모든 것이 다 새로웠다. 짐을 어떻게 싸야 하는지, 통관을 어떻게 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라 모두 알아보아야 했다. 당시 치과의료선교회에서 해외 치과 진료를 해본 경험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광화문에 있는사무실로 찾아가 물었던 기억이 난다. 발치겸자와 각각의 기구들을 소독해서 가져가야 하고, 사용이 쉽게 천을 제작해야 한다고 구강외과 박광호 교수님이 조언을 주셔서 동대문으로 천을 맞추러 갔던 기억도 난다.
모든 기구와 물품 리스트도 다 영어로 정리하고 김포공항 출국 1주일 전, 통관을 위한 리스트를 제출해야 한다고 해서 2년 후배인 구본진과 엄청나게 고생을 하며 작성했다. 나의 3학년 여름방학은 이렇게 해외진료 준비로 시작해서 선교 여행으로 끝났다. 나도 배낭여행 핑계로 빠져 볼까 생각도 했지만 본과 1학년 때 이미 갔다 온 상태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도 동기들과 후배들이 도와주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어찌어찌 출발 당일이 되었다.
그런데 출국하는 주일 날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실질적으로 준비를 가장 많이 했던 레지던트 3년차 백철우 선배는 육군 방위 출신이고, 난 군 면제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출국하려면 동사무소에 가서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헉....!!!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었는데.....’ 공항 안에 임시 동사무소가 있었지만 주일이라 문을 닫았다고..... 결국 나와
철우 형은 그날 출발을 못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오후 비행기를 탈 준비를 하는데 눈이 침침한 게 좀 이상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바로 안과에 갔더니.... 글쎄, 아폴로 눈병이라나....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반드시 수건은 따로 쓰라면서 푹 쉬어야 낫는다고 한다. “오늘 오후에 비행기로 필리핀 가서 의료봉사 해야 하는데요!” 안과의사가 나더러 미쳤다고 한다. 하지만 주님의 뜻으로 믿고 나는 떠났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눈병을 전염시키지 않고 잘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게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걸려본 아폴로 눈병이었다. 가기 전부터 이런 해프닝들 있었으니 가서는 오죽 많았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이 다 사탄의 방해 공작이었다고 생각된다. 첫 해외선교 사역이었으니 더욱 심하지 않았을까.
필리핀에서의 일들은 백 교수님이 앞에 잘 써주셨으니 비하인드 스토리만 적어본다. 진료 장소는 도시빈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파타산의 교회였다. 좁은 건물은 창문도 없이 다 열려 있었고 전등도 마땅치 않아 전선을 근처 고압선에서 따다가 연결한 긴 형광등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두 번째 진료지는 화산 폭발 이재민촌이었다. 이곳에서의 일들은 평생 나를 미소 짓게 만드는 나만의 소중한 추억이다. 산 위에 덩그러니 모아 놓은 초가집들이 난민촌의 실제 모습이다. 내 것을 거저 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잊히지 않는다. 아이들의 부모도 우리도 그저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했다. 환자 대기실과 진료실 구분이 없는 좁은 초가집에서 맨발의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바닥도 전부 흙바닥이었다.
장비를 지켜야 해서 철우 형과 나만 창문도 벽도 없는 교회에서 잠을 잤다. 그런 경험을 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무서움과 재미가 혼재했던 하룻밤이었다. 이른 새벽, 선잠을 깼는데 너무 출출해서 컵라면을 먹으려고 하는데 물을 끓일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 그때 자불소독기가 눈에 띄었다. 피가 많이 묻은 기구를 끓이는 스팀 통인데, 웬만한 비위로는 이것으로 음식을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거기에 물을 끓였다. 그리고 맛있게 먹으려는 찰나... 커다란 눈망울로 우리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물을 머금고, 어금니를 악문 채 우리는 딱 한 젓가락만 입에 대보고 아이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지금 돌아보면 어떤 섭리와 인도하심이 확실히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각자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모든 것이 첫 경험이었지만 모두가 하나님이 만드신 형상이라는 생각으로 성실히 진료하려고 아등바등 힘을 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갔던 첫 해외 치과 의료선교.... 그 시작이 24년이나 이어지고 나서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20대와 30~40대를 살아오면서 남들도 인정해주고 나에게도 떳떳한,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리고 싶다. 앞으로도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묵묵히 수행해 나갈 것을 다짐하며, 귀한 추억의 펜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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