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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루스텐버그 (11회)
일시: 2003년 7월 12일~19일
장소: 남아프리카 공화국 루스텐버그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김성오 교수, 임문우, 구본찬, 박영진, 이성준, 지혁준, 안광석, 김경석, 김영재, 오민석, 김민규, 최재평, 도레미, 이석우, 이윤섭, 이현정, 정덕희, 한윤범, 정지양, 이규환
김성오 (18회 졸업, 연세대 치과대학 소아치과학교실 교수)
남아공에서의 사역은 내가 치과대학으로 발령받고 처음으로 참여한 에셀의 해외 진료이다. 학생 때는 에셀을 통해 여름과 겨울에 농어촌 전도활동과 무의촌 진료에 참여했는데, 대학 졸업 후 수련 받고 군대를 다녀오면서 참여를 못하게 되었다. 90년대 중반, 백형선 교수님이 해외진료를 시작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한 번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회를 찾던 중에 다시 학교로 들어오면서 에셀 모임에서 말씀 선생님도 자원했고, 해외진료에도 자원해 동참하게 되었다. 에셀에 대한 사랑과 열의가 졸업 후에도 남아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학생 때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루스텐버그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는 조성수 선교사님이 우리 학교에 오셔서 백형선 교수님을 만나 면담한 후에 사역지가 결정됐다. 백 교수님은 해외진료를 위해 출발 몇 달 전부터 기도회를 인도하셨고, 일주일 전부터는 매일 기도회를 했다. 또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며 필요한 사항들을 알려주셨다. 학생들도 열심히 참여하고 준비했는데, 참여자 명단 작성, 여권 리스트 작성, 세관 통과를 위한 장비 리스트 점검, 진료에 필요한 약품 정리 등 제반사항들을 챙겼다.
졸업생으로 임문우, 박영진, 이근형 선생님이 필요한 기구와 장비들을 점검해 주셨는데, 당시 이석우 학생이 의료원에서 약품을 수령할 방법을 알려주어 세브란스병원 내 의료선교센터의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출발 전에 다락방과 의료원 양쪽에서 파송예배를 드리며 분주한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새로 회장이 된 이윤섭 군과 진료부장 이석우, 정덕희, 이현정, 도레미, 김지희 등 학생이 주축이 되어 밤늦게까지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아프리카에 에이즈 환자가 많다고 해서 특별히 바늘에 찔리지 않도록 캡을 씌우는 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지금까지 에셀 팀이 가본 지역 중 가장 먼 곳으로 싱가포르를 경유해 비행기만 20시간 가까이 타야 했는데, 남반구라서 우리는 7월이었지만 그곳은 겨울이었다. 비행 도중 백형선 교수님이 쓰러지셔서 대원들이 놀라기도 했다. 다행히 스튜어디스의 기지와, 구강악안면외과 수련 중이던 오민석 선생의 응급처치 시행으로 다행히 계속 비행을 하실 수 있었다.
우리는 먼저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해 역사박물관을 방문했다. 백인에게 인종차별을 받았던 현지인들의 아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루스텐버그 메리팅 지역 선교사님의 사역지로 이동 중 인근의 흑인 빈민가 판자촌을 보게 되었는데, 전기와 수도도 없이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 살고 있었다. 도착한 사역지의 커뮤니티 홀에 장비를 풀고, 숙소인 선교사님의 선교센터에서 도착예배를 드린 뒤 휴식을 취했다.
둘째 날, 아침 QT를 하고 진료 장소로 이동해 장비를 설치하고 진료를 시작했다. 시술하는 의사와 돕는 학생이 손발을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는 달랐지만, 서로 표정과 눈빛만 보아도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치료를 대기하던 환자들 중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오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임문우 선생님은 선교사님에게 부탁해 오렌지와 바나나를 하나씩 나누어주기도 했다.
셋째 날에는 프리토리아 한국대사관에서 영사님 두 분과 함께 영광교회 소속 교민들이 정성껏 손수 만드신 김밥을 싸서 격려 방문을 해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우리는 남아공에서 황송하게 김밥을 점심으로 먹으며 진료에 임할 수 있었다. 치료를 받은 어떤 흑인 남성은 즉석에서 이를 치료받는 그림을 에이프런에 그려서 선물로 주었는데, 그 그림에 쓴 “아픈 이를 치료해줘서 고맙습니다.”라는 감사의 메시지에서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진료 중에 박영진 선생님이 BGM으로 기타 연주와 함께 복음성가를 불러주었고, 흑인 아이들에게 찬송가도 가르쳐 주었는데, 진료에 임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힘이 되는 은혜로운 찬양이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또 한 가지, 늦은 오후에는 구본찬 선생님이 흑인들과 함께 “신자 되기 원합니다.”라는 찬송가를 합창했던 일도 기억난다. 흑인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음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배운 찬송가를 즉석에서 아름다운 화음으로 부르니 무척 아름답고 감동적인 선율이 되었다.
진료 도중 컴프레서가 고장 나는 사고가 있었다. 우리가 가져간 것은 의료용으로 특수 제작되어, 압축공기에 기름이 나오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우연히 선교사님이 건물에서 오일레스 컴프레서를 발견해 바로 투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장비가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이었다. 당연히 진료 효율도 높아져서 환자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나중에 한국에서도 오일레스 컴프레서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금까지 13년 동안이나 강력하고 효과적인 오일레스 컴프레서를 중앙집중식으로 설치해 치과병원 수준의 효율적인 운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료 후에는 매일 평가회를 가졌다. 그날 있었던 일들, 다음날 더 잘하기 위해 준비할 것들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웃사랑의 사역을 우리 모두가 몸과 마음을 다해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이곳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끼시는지 알 수 있었다. 환자에게 입 크게 하라고 부탁하던 현지어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탐마!” (크게 아~ 하세요.) 평가회가 끝날 때는 졸업 선배님들이 잔잔하게 감동적인 기도를 돌아가며 해주셔서 후배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취침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 날은 현지관광을 했다. 선시티의 놀이동산 같은 곳에서 관광을 하고 사파리 투어도 했다. 사파리가 너무 넓어 동물을 몇 마리 구경 못했는데, 나중에 집결지에 모여 기다리고 있을 때, 큰 사슴이 바로 옆에서 나뭇잎 먹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깜짝 놀란 기억이있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가 아니기를 다행이었다.
나는 예과 2학년이던 1987년 가을에 에셀에 들어왔다. 중고등학교 시절이 하나님의 실존을 굳게 믿고 지낸 시절이었다면, 나의 대학생활 초기는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에 대한 물음으로 방황하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에셀에 들어온 해에 박경준 선배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를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쭉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지내왔다.
직장을 바꾸고 이사를 갈 때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고, 여기 치과대학의 교직에 있게 된 것조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분께서 존재하시기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감사드리며,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가 늘 함께 하기를 바란다.
2002년 태국 치앙라이 (10회)
일시: 2002년 7월 10일~17일
장소: 태국 치앙라이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이근형, 지혁준, 지성훈, 김두형, 서예준, 김경석, 정회훈, 이동우, 조혜영, 정 완, 김민석, 김민형, 나혜원, 황선아, 김영희, 임지인
이근형 (16회 졸업, 이근형치과 원장)
너무나 치열한 한 해였다. 개원한지 10년차, 전쟁을 치르듯 살아온 날들…. 어느 날 환자와 씨름하는 많이 지친 내 모습이 보이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문우 형이 에셀 해외 선교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나도 따라 갈 수 있는지 물었다. 학생 때 함께했던 말레이시아 사라왁에서의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진료 사역 과정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부탁을 드렸는데 다행히 기회를 얻어 동행하게 되었다. 처음 가보는 태국 치앙마이에 도착해 다시 치앙라이로 이동했다. 관악구에서 개원 중 안식년을 스스로 챙기시며 태국에서 치과진료로 사역하고 있는 이혁 선배를 만나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도착해서 확인한 진료지 환경은 열악했다. 라후족을 대상으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을 도와 라후족 사람들과 산지족들을 데려다 진료를 하게 되었다. 산지족은 언어가 달라 또 다른 통역이 필요했다.
숙소로 선교센터 내부를 활용하다가 너무 답답해서 아예 진료를 했던 교회 안에서 자게 되었다. 백 교수님을 바닥에 모실 수가 없어서 강단 쪽으로 배려했던 기억이 있다. 다음날 아침, 자다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는데,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나 나올법한 커다란 지네가 내 가슴 위를 횡단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세수는 작은 수돗가밖에 없어서 여학생들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진료 여건도 열악했는데, 보존치료는 특히 성에 차지 않았다. 진료 장소를 교실로 이동한 뒤로는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다. 아주 조금.
지금은 추억이지만 꽤나 힘든 여건이었다. 특히 식사는 아무거나 잘 먹는 나조차 적응이 어려워서, 백 교수님 사모님이 만들어주신 수제 고기볶음 고추장이 없었다면 식사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커다랗고 맑은 눈을 가진 아이들을 치료한 경험은 정말이지 잊히지 않는다. 눈이 어찌나 큰지 아이들이 워낙 작아서 눈이 더 커 보이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언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도화지처럼 맑은 눈동자... 그곳 어른들의 초점 잃은 눈과 대비가 되어보였다.
귀국하는 날, 그 지역에서 제일 유명한 사찰을 관광하게 되었다. 예전 우리나라의 국도 같은 태국 고속도로를 거쳐 도착했는데, 조용한 우리나라 사찰과는 많이 달랐다. 저녁은 그간의 식사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뷔페에서 만찬을 나누었다. 하지만 식사를 제대로 못한 날들이 길어서인지 밥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비행기는 본진과 떨어져 다음날 귀국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난생처음 하늘에 가득한 은하수와 별빛을 보게 하셨고, 무엇보다 선하고 맑은 아이들의 눈빛을 보게 하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하도록 에셀과의 만남을 허락하시고 동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많은 진료에도 한 번의 사고 없이 저희 모두를 항상 지켜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희 모두의 삶에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눌 기회를 허락해 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1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9회)
일시: 2001년 7월 10일~7월 17일
장소: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지혁준, 지성훈, 김두형, 박성헌, 김경석, 김재욱, 김영재, 방난심, 안현철, 최형준, 김민형, 이동우, 정회훈, 조혜영, 나혜원, 홍수정, 황현정
이동우 (30회 졸업, 연세웰키즈치과 원장)
내가 키르기스스탄 진료 봉사에 참여했을 때는 본과 3학년이었다. 벌써 15년이 지나서 솔직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처음에 나라 이름을 들었을 때는, 무슨 ‘스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중앙아시아 어디쯤에 있는 나라일 텐데, 도대체 뭐하는 나라인지 궁금했다. 그 때는 네이버도 생긴 지 얼마 안 되고 인터넷에 자료가 별로 없어서 선교사님이 보내주신 자료로 대략적인 것만 알고 가야 했고, 현지에서 정보를 많이 얻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료 준비를 하는 데도 어려운 점이 많았다. 지금이야 에셀이 굉장히 부흥해서 많은 후배들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재학생 전체가 본과 3학년에 나와 회훈이 형, 4학년의 형준이 형과 영재 형, 재욱이 형... 이렇게 다 해도 5명이니 규모가 아주 작았다. 그래서 해외 진료를 준비하면서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당시 한창 바쁠 때인데도 본과 4학년 형들이 열심히 준비해 주시고 수련 중인 선배님들도 많이 도와주셔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가는 항공편도 직항이 없어서 우즈베키스탄에서 하루 머물러 갔다. 그때 쓰던 치과유닛용 컴프레서가 까만 서류가방 형태였는데, 이게 상당히 무겁고 파손 위험이 있어서 직접 들고 다니느라 애먹었던 기억도 난다. 현지에서의 숙소는 선교사님의 배려로 지금의 펜션 같은 느낌에 아담하고 깨끗한 곳이었고, 기후도 덥지만 건조해서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하니 감사뿐이었다. 진료에는 아주 많은 분들이 오셔서 정신없이 돌아갔고, 마지막 환자분이 돌아가면 다들 녹초가 되었지만, 마음은 보람과 기쁨으로 가득한 정말 귀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키르기스스탄 진료 봉사의 대미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은, 마지막 저녁 식사로 현지 분이 대접한 양고기였다. 큰 양을 몰고 와서 모두가 보는 데서 잡았는데, 전혀 저항 없이 순종하는 모습을 보며 예정된 죽음 앞에 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양을 잡아 다 같이 배부르게 먹었는데, 그곳 풍습은 양의 눈알 부분을 눈이 밝아지라는 의미로 제일 연장자가 먹게 되어 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백 교수님이 무척 난감해 하시면서도 드셨던 기억이 나는데, 눈이 좀 밝아지셨는지 모르겠다.
이 글을 계기로 에셀에서 활동하던 시간들을 다시 기억해 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치과 진료라는 매우 특별한 은사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 그저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이었던 것 같다. 가고 오는 길은 고단하지만 매일 진료를 무사히 마쳤을 때의 뿌듯함이란,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생생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많은 후배님들이 이런 귀한 체험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2000년 캄보디아 콤퐁참 (8회)
일시: 2000년 7월 6일~12일
장소: 캄보디아 콤퐁참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지혁준, 김성태, 박성헌, 지성훈, 강민재, 고형준, 권혁락, 심우현, 오민석, 김경석, 김재욱, 안현철, 한정선, 이동우, 정회훈, 김우진, 허나래, 김민정, 장진희, 임지인
심우현 (28회 졸업, 在英)
나는 다른 선후배님들처럼 많은 해외사역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1998년 인도에 이어 2000년에 캄보디아 때 참여했다. 자주 동참하지는 못하지만, 이 사역이 24년을 넘어 앞으로 더 아름답게 이어지도록, 주님께서 우리가 지치지 않도록 배려하신 한 해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사역지인 콤퐁참은 프놈펜을 통해 들어갔는데, 지금은 직항으로 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태국을 경유해야 했다. 차로 이동하는데 내 기억으로는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선교사님은 그 길이 한국으로치면 1번 국도 역할을 한다고 알려주셨다. 날씨가 두 해 전 사역지인 인도보다는 상대적으로 한결 나았던 터라 큰 고생없이 잘 도착했는데, 숙소에 있는 침대와 에어컨을 보고 콘크리트 바닥에서 침낭을 깔고 자던 경험을 떠올리며 짐짓 놀랐었다. 하지만 어떤 돌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니 방심하지 않고 기도하며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힘을 내기로 했던 기억이 난다. 밤에 잠도 잘 자고, 식사도 잘했다. 기후도 적절해서 진료지 여건도 좋았다.
아침식사로는 주로 빵을 먹었는데 캄보디아가 프랑스 식민지였던 영향 때문인지 의외로 바게트가 아주 맛있었다. 빵에 질릴 때쯤 되면 같은 기간에 미국에서 온 선교팀에서 컵라면을 주셨는데, 영어가 잔뜩 적힌 해외수출용 신라면 용기를 보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저녁식사는 거의 호텔 근처 식당을 이용했는데, 매일 다른 음식을 먹었고, 우리
입맛에 맞도록 현지 선교사님이 잘 배려해주셔서 특별히 힘든 점은 없었다.
후배들은 선교지에서의 식사 메뉴가 간증거리(?)인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인도의 총체적인 난관 때문에 당시에는 먹는 음식도 나름 큰 관심사였다. 인도에서는 구본진 선배님의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고기볶음 고추장을 나누어 먹으면서 겨우 버티기도 했었다. 한국인은 바게트 빵에도 버터 대신 고추장을 발라 먹는 사람들 아닌가?
진료 사역도 별 문제 없이 잘 진행되었다. 그런데 내가 작은 문제를 일으켰다. 환자들 중 아이들이 참 많았는데, 소아 진료 중 국소 마취 후 바늘에 캡을 씌우다 실수로 손가락을 찔린 것이었다. 잠시 걱정이 되었지만 진료팀 모두 진심으로 기도해주시고 걱정해주신 덕에 다행히 큰 문제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단순한 해프닝일 수 있지만, 환자들이 쏟아져 들어와 대기하고 있는 상태에서 무리해서 진료하다 보면 항상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선배들이 엄격하게 규율을 잡고 정해진 매뉴얼대로 진료를 준비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주의해야 할 것이다.
모든 진료 사역이 끝난 후 프놈펜 관광을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70~1980년대 캄보디아에서는 많은 민중 학살이 일어났었다. 영화 <킬링필드>로도 잘 알려져 있다. 프놈펜의 한 박물관에서 당시 자료들, 특히 여러 개의 해골로 만든 캄보디아 지도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다른 해에 비하면 별다른 이벤트나 사건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열심히 준비하고 따른 결과, 계획된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그것은 모두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값진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여러 선후배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해외 선교사역을 이어나가리라 믿으며, 생각날 때마다 에셀을 위해 기도할 것을 약속한다.
1999년 아제르바이잔 에이블라 (7회)
일시: 1999년 7월 11일~18일
장소: 아제르바이잔 에이블라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임문우, 구본진, 김성태, 지혁준, 박성헌, 지성훈, 서예준, 김성현, 고형준, 강민재, 오민석, 박민나, 한지연, 강숙정, 권유림, 임지인
지혁준 (25회 졸업, 키즈엔젤치과 원장)
아제르바이잔은 불의 나라이다. 성경에도 그렇게 표현되고 있는 아주 오래된 나라로 산유국이며 대부분이 무슬림이다.18 우리는 이 나라로 가기 위해 특별히 많은 준비를 하며 가슴을 졸였었다. 장기간 이동에 따른 화물비를 아끼려고 미리 선박으로 장비의 대부분을 보냈는데, 현지에서 장비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낯선 나라로 선교를 다니다 보면 항상 예상 못한 변수들이 나타나서 마지막 장비를 찾을 때까지 열심히 기도를 하곤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갈 때는 당시 모스크바로 러시아 국적의 항공기를 탔고, 경비 절감을 위해 비자를 받아 시내로 나가는 대신 모스크바 공항 바로 옆에 있는 트랜스퍼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외부와 고립된 상태였고, 잘사는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감옥이 이런 형태일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 같다. 다중의 문들 때문에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 없었고, 같은 층의 휴게실만이 우리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당시 구소련은 개방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촌스러운 분위기였다. 다음날 감옥(?)에서 나온 우리는 근처에 있는 다른 청사로 이동을 해서 아제르바이잔으로 날아갔다. 엄청 맛없는 샌드위치를 기내식으로 먹으면서.... 바쿠 공항에는 현지 사역 중인 백제현 선교사님과 다른 두 명의 여선교사님이 나와 계셨는데 모두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첫날은 미리 보낸 장비를 찾기 위해 항구 세관으로 가서 반나절 정도를 보낸 것 같다. 구름이 낀 건조한 날씨로 제법 더웠지만, 그늘로 가면 뜨겁지는 않았다. 짐을 찾은 우리는 곧바로 에이블라 난민촌으로 향했는데 이곳은 차로 약 1시간 정도 떨어져 있었다. 넓은 유목지대와 모래밭 같은 평지를 계속 달려 허허벌판에 세워진 난민촌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에 전쟁의 흔적 같은 고철덩어리들을 지평선 부근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난민촌에서 우리는 천막으로 만든 공간에 내일의 진료를 위한 장비를 설치했는데, 당시 이란에서 피난 온 치과의사가 있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 분은 처음에는 통역으로 도와주다가 치료도 같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인생에서 처음 만나보는 난민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고립된 채로 생활하고 있었으며, 예상대로 대부분이 심각한 구강 내 질환을 앓고 있었다. 오랜 피난길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기다리거나 줄을 서고 질서를 지키는 일에 익숙하지 않고, 쉽게 흥분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치료보다는 발치 위주의 진료를 주로 했는데, 치아의 뿌리만 남아 있는 환자가 많았다. 생각보다 진료가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3일 동안 난민촌으로 출퇴근을 했고 마지막 날에는 바쿠 시내의 현지 교회 내에서 교인들 위주의 진료를 하는 것으로 아제르바이잔에서의 일정을 마쳤다.바쿠에서의 마지막 진료를 마치고 저녁은 시내에서 현지 음식을 먹었는데 식사를 하면서 벨리댄스 비슷한 전통 춤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현지에서 사역을 하던 스웨덴 자매님과 핀란드 가족 분들도 합류했는데, 이 분들도 우리를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셨었다.
마지막 날 오전에 잠깐 관광을 하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도착하고 보니 당시 본과 4학년이었던 김성현을 관광지에 놓고 그냥 우리끼리만 온 것이 아닌가! 일행이 많다 보니 전체가 다 있겠거니 하고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다. 다행히 성현이가 혼자 택시를 타고 손짓발짓 설명으로 공항에 나타났지만 그때의 당혹감은 오랫동안 강하게 남은 아제르바이잔에서의 기억 중 하나이다.
이후로는 진료팀 전 대원이 고유번호를 받아 모일 때마다 번호를 부르고 맨 마지막 번호가 끝나야만 이동을 하는 전통이 세워졌다. 안타까웠던 일은 우리가 귀국 후에 바쿠의 교회가 정부 탄압으로 폐쇄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17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일들이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글을 쓰다 보니 또 많은 추억이 여전히 내 머릿속에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게 이런 은혜가 충만한 경험을 가능케 하신 우리 주님께 감사드린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1998년 인도 캘커타 (6회)
일시: 1998년 7월 12일~19일
장소: 인도 캘커타
참여대원: 백형선 교수, 전혜만, 임문우, 한승훈, 구본진, 김성태, 권병기, 박성헌, 이재익, 서예준, 지성훈, 채규호, 심우현, 강민재, 주진희, 문현정, 박민나, 박수진, 한지연, 임지인
구본진 (24회 졸업, 베스티스치과 원장)
에셀의 해외 사역은 2016년 현재 스물 넷 청년의 나이가 되었다. 1993년도 본과 1학년 때부터 자연스럽게 참여한 나는 수련의 기간 중 해외 파견, 공중보건의, 그리고 개원 등 몇 해를 제외하고는 일상처럼 동참할 수 있었기에 이제 치과 의료선교는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가 큰 것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 여러 번의 과정 중 최악의 고생길이 어디였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인도에서의 진료를 꼽을 것이다. 인도에서 살아본 분들도 인도에서의 첫 사역을 캘커타 지역에서 했다고 하면 처음부터 너무 센(?) 곳으로 갔다고 할 정도였다. 나는 그 몇 년쯤 전에 보았던 영화, 바로 그 캘커타의 인력거꾼 이야기인 <시티 오브 조이>(City of joy)를 기억하며 ‘사역에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은 습하고 더워서 육신의 피곤함은 차치하고라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 하나하나가 문화 충격이자 정신적 트라우마로 남았다.
인도는 중국 다음으로 많은 인구에 핵무기와 인공위성을 보유할 정도로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진 나라지만, 최고급 벤츠가 달리는 거리를 인력거 릭샤가 함께 달리는 나라이기도 하다. 또한 강어귀에는 시신을 화장하는 광경이 일상적인데, 그 강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의 모습도 흔한 풍경이다. 강가 언덕에는 천을 이어 붙여 만든 집 아닌 집들이 연달아 이어져 있었고,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노숙에 지친 삶의 무게가 역력했다.
캘커타에서 버스를 타고 찬드라코나 라는 지역의 고아원에 새벽 4시 경 도착했다. 피곤한 나머지 숙소라고 알려준 건물 바닥에 침낭을 깔고 죽은듯이 잠을 청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바로 옆에서 개가 함께 자고 있었고, 바닥에는 죽은 나방을 개미가 끌고 가는 장면이 보였다. 아마도 우리가 수면을 취한 곳은 창고이고, 고아원에서 키우던 개의 침실(?)이었던 모양이다. 근래에는 여관이나 호텔 등으로 숙소를 정확히 정해서 가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진료 중에도 너무 땀을 많이 흘려서 나중에는 전혜만 선생님이 소금을 조금씩 먹고 일할 수 있게 해주셨다. 지나고 보니 당시 대원들이 느꼈던 두통은 땀을 많이 흘려서 생긴 전해질 이상 반응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덥고 습한 날씨는 밤이 돼도 그대로였다. 새벽 3시경, 잠도 잘 오지 않아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샤워라도 하려고 나가보니, 백 교수님이 계셔서 다시 들어온 기억이 있다. 교수님 역시 너무 덥고 피곤한 나머지 잠을 설치신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현재 레알 마드리드의 지단 감독이 현역으로 브라질을 압도했던 월드컵이 열린 해라서 그런지 창고에서 우유팩을 차며 축구 삼매경에 빠지는 이들도 있었으니... 열심히 팩을 차던 김성태 교수와 故 지성훈 선생이 기억난다. 그때 고생의 정점은 찬드라코나에서 다시 돌아오던 버스. 한국처럼 도로 사정이 좋다면 두세 시간으로 충분한 거리였다. 그런데 황당 사고가 발생했다. 버스 타이어가 빠지다니... 다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지만, 밤중에 길바닥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꼬박 밤을 새웠다. 안 그래도 피곤한 상태에서 갇혀 버린 버스 안은 모기들의 천국이었다.
화장실도 식당도 없는 상태에서 물에 탄 선식을 먹으며 버텨낸 일행이 정말 대견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당시 멘붕 상태라 10시간이 좀 넘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중에 백 교수님이 16시간이었다고 정확히 알려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진료를 마치고 나중에 방문했던 곳은 테레사 수녀가 사역했던 ‘죽음의 집’. 전 세계에서 온 젊은이들이 걸인과 환자들을 돕고 있었고, 바로 앞 칼리 신전에서는 실제로 동물이 제물로 희생되어 흐르는 붉은 피가 신전 바닥을 적시면서 수많은 예쁜 꽃잎과 어우러져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보기 힘들지 모를 많은 인도 사람들.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달되려면 결국 전도와 선교가 답이기에 그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들의 노고가 참으로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도는 어느 곳보다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한 곳이 분명하다. 언제 다시 그 땅을 밟게 될까? 아마도 하나님만 아실 것 같다.